1995년 6월 25일 목요일, 서울에 있는 한 백화점.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던 저녁, 평소에 비해 실내가 덥게 느껴지던 그 백화점 안에는 약 천오백명 가량의 쇼핑객이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은 지하 식품부에서 저녁꺼리를 사고 있는 중이었다. 지어진 지 5년 밖에 안된 최신식 건물로, 서방 세계의 값비싼 고급 매장이 줄줄이 들어서 있던 그 백화점은 하루에 대략 4만명의 쇼핑객이 다녀가는 곳이었다. 고속버스 터미널로 부터 500m, 서초동 고등 법원으로 부터 300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곳은 세계적으로 안전이 입증된 무량판 공법(Flat Slab)으로 지어진 건물로 그 튼튼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물론, 지어진 그 공법이 무엇이건 그 곳에 일하는 혹은 그 곳을 오가는 그 누구도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그 백화점의 구조적 안정성을 의심하거나 건물 옥상이 내려 앉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오후 5시 55분을 지나가던 시각. 천오백여명 가량의 쇼핑객들이 쇼핑을 하고 있던 그 곳, 삼풍 백화점에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마치 비행기 포탄에 얻어 맞기라도 한 것처럼, 화려한 그 5층 건물이 갑자기 옥상에서 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지하 4층까지 뻥 뚫려 버리는 대형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는 불과 2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뒤에 남은 것이라곤, 엘리베이터와 비상 계단이 있던 건물 측면 뿐이었다. 졸지에 생매장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콘크리트 잔해 밑에 파묻혀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현장은 별안간 전쟁터의 참상을 재현하고 있었다..
“삼풍 백화점 붕괴”, 8.15 광복 이후 가장 큰 인적 재해로 기록된 그 사고로, 사망자만 총 오백여명이 발생했고 나머지 천여명은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부상과 충격을 입게 되었다. 사고가 일어나자 현장 조사팀이 제일 먼저 의심한 것은 가스 폭발이나 폭탄 테러의 가능성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건물이 그 같이 한순간 무너질 수 있는 원인으로는 폭발이나 폭탄 이외의 경우를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고 당시 발생한 연기는 가스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너진 건물에 지하 주차장의 차들이 폭발해서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잔해 어디에서도 폭탄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테러의 의한 사고도 아니었다. 남은 가능성은 오직 하나, 부실공사 뿐이었다.
진상 조사단은 건물의 설계도를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같은 사태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구조적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설계도 상으로 그 백화점은 4층 건물이었으나 실제로 세워진 것은 5층 건물이었던 것이다. 애초 그 건물은 백화점 용도가 아니라 근린 생활시설로 설계되어 4층 이상으로 올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삼풍 회장은 중간에 용도를 변경하여 시공업체였던 W건설에게 5층을 올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1층을 더 올리려면 하중이 늘어나는 만큼 더 두꺼운 기둥이 필요했으므로 W건설 측에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자 삼풍 회장은 시공사를 자기 계열사인 삼풍 건설로 대체해 버리고 기둥의 폭을 늘리기는 커녕 백화점의 시각적 효과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애초 4층 건물로 설계된 기둥 두께를 오히려 25%나 감소시킨 상태에서 한층을 더 얹어 5층 건물을 지어 버렸다.
결국, 건물이 붕괴된 근본적인 원인은 건물주의 그 같은 불량함과 인과적인 건축의 부실함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날의 대형 인명 참사로 이어진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건물이 무너지기 수개월 전 부터 이미 곳곳에서는 붕괴의 조짐들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사가 일어나기 몇시간 전에도 5층 식당에서는 천장에 금이 간 것이 목격되었고 탁자가 놓여진 바닥은 눈에 띠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건물 검사관은 한 눈에 위험을 감지하고 운영자 측에게 즉시 사람들을 대피시킬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운영자 측은 진동을 일으키는 옥상의 대형 에어컨을 끄고 5층 만을 폐쇄한 후 천장의 틈을 대충 보수하는 것으로 간단히 사태를 무마하려 했다. 그리고 나머지 층은 모두 영업을 계속하게 내버러 둔 채 자신들의 귀중품을 지하실로 옮기고 아무런 공지 없이 무책임하게 건물을 빠져 나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불과 20초라는 짧은 순간 동안, 오백명에 달하는 무고한 사망자와 천여명의 부상자를 내며 건물은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그 일련의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안타깝지만 우리는 매우 심각한 결론을 하나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삼풍 백화점 참사가 결코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태가 아니라 삼풍이라는 기업을 구심으로 거의 조직적이고 명시적으로 행해진 막연한 다수에 대한 범죄 혹은 테러 행위였다는 사실이다.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나 아프카니스탄의 카불 등에서 벌어지는 그것과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그 목적이 특정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부정한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수단이 '살상용 폭탄'이 아니라 '인격적 파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격적 파탄'에 의한 테러는 '살상용 폭탄'에 의한 그것보다 훨씬 참혹하고 광범위한 피해를 양산하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라 볼 수 있다. 첫째 인격 상실의 테러는, 핍박받는 지역의 소위 투사들이 정치나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하는 최소한 협상 가능한 '극단적 저항'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만연한 탐욕이나 불안 혹은 양심 불량에 근거하여 거의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죄없는 희생자들의 발생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발생 원인에 비추어 보통 테러 이상으로 유해한 그 같은 현상이 단지 '사건'이나 '사고'로 칭해진다는 이유로 그 실제적인 위험성이 거의 각인되지 않고 인과적으로, 서서히 데워지는 거대한 솥 안의 개구리처럼 다가오는 위험을 분별하고 제어할 '혜안과 역량'을 결집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됨으로서, 일상과 세상 곳곳에 '파탄의 폭탄' 피해가 무작위로 속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삼풍 참사 뿐 아니라 성수대교 붕괴, 시랜드 화재, 대구지하철 방화, 이천 냉동창고 화재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한 크고 작은 안전사고나 한해 수십만 건에 달하는 교통사고 등이 우리에게 웅변하는 것은, 안방에서 재난 영화를 관람하듯 시청하는 각종 미디어의 사건 사고의 본질이 기자나 형사에 의해 초점으로 부각되는 특정 개개인의 과실과 비행임을 넘어, 부지불식 간 우리 모두가 별 문제의식 없이 공유하는 '도덕 불감증'과 '안전 불감증'에 주로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러낸 역량이 행사를 추진하고 담당한 특정 담당자의 노고임에 앞서 그 같은 국가적 행사를 치러낼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을 신장시킨 국민 모두의 노고에 힙입은 것이듯,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특성상, 개별적으로 드러나는 '불량과 불감'의 '사건과 사고' 역시 특정 당사자의 문제임을 넘어 우리들 대다수가 공유하는 '불량과 불감'의 문제로부터 주로 기인한다는 얘기다.
그런 차원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세상의 문제에 대해, "그 상황에서라면 과연 나는 더 나은 선택을 했을 것인가" 타산지석의 계기로 삼는 동시에 공공적으로 책임을 통감하는 것은, 도덕적인 일인 동시에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무엇보다, 개별적으로 발생하는 각종 사건 사고들을 사회 전체적 시야로 확장하여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대신 개별 당사자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 분노의 비난을 퍼붓게 되면, 잠시 마음의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는 있으나 반복되는 '파탄의 테러'를 막을 길은 찾을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개별적으로 책임을 지고 반성을 해야 할 부분과 집단적으로 책임을 통감하고 질서를 조정해야 할 부분을 적정하게 구분하는 대신, 개별적으로 모든 원인과 책임을 찾고 묻는 현상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면 결국 사건의 당사자는 개별적인 죄의 댓가 뿐 아니라 집단적인 죄의 무게까지 합산된 마녀사냥을 당하지 않을 수 없고 집단 - 또다른 개인들이 군집된 - 은 스스로 고쳐가야 할 '사회적 자아'의 문제를 소수의 희생자에게 투사해 책임을 떠넘겨 버림으로서 자기 내면에 체화된 모순의 뿌리를 고스란히 유지하게 되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반성하려 하기 보다 괜히 가중된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오히려 잘못을 숨기려는 관성을 보이게 되고 집단 역시 외부적 희생양들을 끊임없이 추적하는데 주력하기는 하나 스스로 자성하고 질서를 고쳐갈 생각을 하지는 않기 때문에, 동일한 문제는 대상과 상황이 달리질 뿐 간단없이 지속된다.그와 같은 모순의 역사는 수천년에 걸쳐 면면히 성장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으나, 아무래도 지난 20세기 만큼 그 성장세가 두드러진 적도 없었을 것이다.
특히, 1910년 한일합방을 맞아 치욕의 36년을 보내고 그로부터 5년 뒤 6.25로 폐허가 된 땅덩어리 위에서 일단 먹고 사는 것에 급급했던 대한민국에게 있어, 그 같은 내면화된 이율배반의 모순과 과거 식민의 관성을 게워내고 홍익인간이라는 선조의 이상을 펼쳐 내는 데는 여로모로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념으로 양분된 세기적 환경 속에서 남북으로 대치된 군사적 긴장을 무마하며 체제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모순', '도덕적 모순'에 앞서 '경제적 빈곤'을 퇴치할 필요가 있었다. 태평양 너머의 풍요로운 미국에 비해 한없이 초라하고 배고픈 이 땅의 현실, 언제 공산주의 북한의 남침이 재현될지 또한 제국주의 일본의 야욕이 재기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원도 없고 기술도 없는 대한민국으로서는 절망에 가까운 조급증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군자의 나라'라 일컬어지던 대한민국이 과거와 주변의 모순을 돌아 보는 것도 잊은 채, 뭐든지 빨리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조급증'에 시달리게 된 것은, 근대화에 지각함으로서 겪은 치욕의 식민지 시절과 주변 열강에 휩쓸려 이념의 대리전을 치를 수 밖에 없었던 민족적 상흔,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배고픔의 현실을 딛고, 당장 살아 남기 위해 그간 풀어내지 못한 산더미 같은 숙제들을 밤낮없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한순간 맞닥뜨렸기 때문이었다. 살아 남는 것 자체가 중요했던 그 시절, 생생한 식민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식민의 패턴을 답습하는 군사 정부를 암암리에 용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생존의 일차적 욕구 해소를 위해 과거와 주변을 돌아보고 반성할 여유 조차 없었던, 배고픈 시절의 되풀이되는 아픔에 다름 아니었다. 그로인해 초가집을 없애고 마을길을 넓혀 먹고 살만한 시절이 올 때까지, 정확히 말해 1987년 6월까지 사람들은 민주적 세상에 대한 열망을 유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997년. 이 땅 대한민국에는 직선제 부활 이후 10년 만에 투표에 의한 민주적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5.16 군사반란 이래 군부의 핵심 세력으로 존립해 왔던 극우 정당과의 연합에 의한 반쪽의 승리였고 또한 그 해에 IMF 사태가 터져 경제적으로 국가 존망이 흔들리게 됨으로서 민주적 정치 환경에 걸맞는 도덕적, 교육적 환경의 재건은 또다시 기약없는 후순위로 밀려나게 되었다. 어찌보면 5.16 군사반란 이래 누적되어 온 총체적 부실이 그 같은 경제 위기로 표출된 것이라 볼 수 있었지만, 그런 국가적 위기를 맞아 민주화를 외치던 투쟁 세력들이 시의적절한 방향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군사 정권에 부회하던 관료 세력에게 의존하여 극우적인 정책을 남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와 염증을 사람들에게 안겨 줌으로서,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난 2007년에는, 투표라는 민주적 기제를 타고 과거 군부 세력들이 다시금 청와대로 부활하는 퇴행적 시대상황 마저 펼쳐지게 되었다.
덕분에, 과거의 새마을운동 시절에 선망을 가지고 있는 그 정치 세력들의 투혼에 힘입어, 이미 세계 10위 권의 경제대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은 다시금 초가집을 없애고 마을길을 넓히던 시절의 빨리빨리 군인 정신으로 회귀하는 중이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지난 세기와 달리, 세계 최고층 빌딩을 우리 기술력으로 지어 올리는 이 시대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더이상 기술력이나 창의력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데 필요한, 즉 내 가족을 사랑하는 만큼 네 가족을 사랑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삼풍 참사에서 살펴 본 것처럼, 거대한 건물의 붕괴와 수많은 목숨의 희생은 기술력과 창의력의 부족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덕성의 부재로, 오히려 탄탄한 기술력을 허물고 창의력을 부도덕한 이기성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초가집이나 마을길이 붕괴되면 상처를 입거나 부상을 입을 수 있지만, 마천루나 대교각이 붕괴되면 목숨을 잃거나 가족을 잃는다. 그런 차원에서 인간을 노예나 머슴으로 부리던 식민과 군사 정권의 잔재 그리고 일상과 세상 곳곳의 명암을 두루 살펴 '형식적 민주주의'를 인간 중심의 '실체적 민주주의'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은 자신의 행복과 안전을 고양하는 첩경임과 동시에 유일무이한 길이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 같은 과업이, 빨리빨리 정신에 따라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민하고 번뇌하는 마음에 따라 한걸음씩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책상 위에서 습득한 기술력과 창의력을 인간적으로 풀어내는 것은 책상 너머로 실제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의 복합적 희노애락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때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같은 변화를 위해서 우리는, 타인의 모순을 지적하는 만큼 자신의 모순을 되돌아 보아야 하고, 자신의 개성을 중시하는 만큼 타인의 개성을 배려해야 하고,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는 만큼 타인의 가족을 존중해야 하고, 정치의 문제를 성토하는 만큼 참여의 자세를 갖춰가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보다, 개별적으로 발생하는 각종 사건 사고들을 사회 전체적 시야로 확장하여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대신 개별 당사자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 분노의 비난을 퍼붓게 되면, 잠시 마음의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는 있으나 반복되는 '파탄의 테러'를 막을 길은 찾을 수가 없다"는 점에서 내외적인 상호적 이타성을 갖추는 것은, 자신의 지속 가능한 이기성 번영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빨리빨리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내 가족과 이웃의 행복과 목숨 만큼 소중한 것은 아니다. 화려한 응용은 탄탄한 기본으로 부터 비롯되고 발전된다. 결국, 소처럼 우직한 마음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지켜내는 것은 빠릿한 정신을 운용하는 이상으로 소중한 미덕이라는 사실, 결코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9-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