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반만년 역사를 통해 많은 국가들을 이루어 왔지만, 이같은 복지사회가 실현된 적은 거의 없었으며, 어쩌면 그와는 반대가 되는 가난한 나라가 계속돼 왔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전해오기도 한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가난의 책임은 국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 스스로가 게으른데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격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같은 속언은 사실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기득권층의 자기 합리화 주장이 만들어낸 악(惡)한 잠언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사람, 즉 의식주를 충분히 해결치 못하는 가장(家長)은 게으른 사람일 경우보다는 근면한 사람일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과거시대 노예나 머슴이 그 주인보다 부지런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며, 현재도 파출부나 막일꾼이 일반 주부나 직장인들보다 훨씬 근면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시장바닥에서 좌판을 벌이는 아낙네들, 그리고 어두운 새벽길을 청소하는 미화원들이 얼마나 부지런해야 하는지는 일반인들은 상상도 하기 어렵지만, 이들의 가난은 뼈가 부러지고 장이 녹을 만큼 혹독하다.
난지도 같은 쓰레기더미 위에서 수건을 뒤집어쓴 부인네들이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라면 분명 신도 분노하실 것이다!
참으로 가난이 게으름 때문이라면 이 땅위에는 이미 『천국처럼 공평하고 정의스런 사회가 실현됐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러하지 않기 때문에 이같은 속담은 거짓말이 분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따위 속언, 즉『가난한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은 한낱 극빈자들을 업신여기려는 저의가 숨겨져 있거나 옛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수탈하여 못살게 해놓고 이같은 자신들의 몹쓸 정치에 대한 책임을 면하는 동시에 당대의 임금님을 성군으로 추켜세우기 위한 아첨의 논리에서 비롯됐다고 단죄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국가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로 정치가 대체로 악하거나 악에 젖어 선(善)을 지향하는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과거를 돌이켜 보면 정치란 항시 정권을 잡기 위해 벌이는 추잡하고 비정한 싸움이었다. 생사를 다투는 이같은 승부의 세계에서 정치가들은 수많은 친구들을 잃거나 심지어 가족까지 희생되는 댓가를 치루면서 차차 철혈인간(鐵血人間)이 되어간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비열한 발걸음이 지연될 경우 그들은 정권은 고사하고 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도태되거나 승자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의 장』에서 승리를 쟁취한 권력자가 과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펼 것인가? 아니면 정권을 더욱 강화시키면서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에 온갖 지혜를 동원할 것인가? 그 해답은 자명해진다.
수천년간 계속된 이러한 정치판의 병폐와 싸움기술이 오늘날의 정치인들에게까지 계승됨으로서 정치는 그 지상목적과는 달리 항상 권력싸움에만 집착하는 악한 집단의 행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기는 하지만 인류는 지금까지 정의스럽고 착한 사람이 정권을 잡도록 하는 정치제도의 마련에는 실패해 왔다고 생각된다.
둘째로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없애지 못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속성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경제란 무엇인가?
이 제도의 으뜸 원리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은 낮은 임금일수록 선호할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가난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은 자본주의하에서 필연적인 결과가 되는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20세기초 무분별한 기업들은 더 많은 이윤의 창출을 위해 국민 대부분을 가난에 떨어뜨림으로서 공산주의를 태동시켰던 사실이 망각되어서는 않될 것이다. 물론 공산주의는 한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몰락하고 말았지만 이것이 인류에게 끼친 해독은 너무나 크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다국적 기업들로 둔갑한 부자들을 인류가 적절한 선에서 억제하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병폐인 빈부의 차를 더 이상 심화시킬 경우, 21세기는 공산주의 정도의 재난이 아니라 종말의 세기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되는 것이다.
뉴욕이나 LA폭동은 가치관(공산주의의 이상)마저 상실한 가난한 젊은이들이 과연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서막에 불과할 뿐, 극심한 빈부의 차이는 전세계를 이같은 광란의 도시로 만들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고 보여진다.
바야흐로 공산주의마저 몰락시킨 자본주의는 21세기를 맞아 이제는 금권통치시대를 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시대의 절대군주체제나 귀족정체 또는 공산주의보다 더욱 큰 불평등과 타락을 인류에게 강요하고 있다.
이같은 황금만능주의의 금권통치 체제하에서 가난한 젊은이들의 분노를, 타락한 종교나 빛바랜 도덕, 그리고 권력의 시녀가 된 법률로, 언제까지나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태이거나 독재자들처럼 인간의 본성을 깔보는 사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가난함은 정년에 따른 노년층의 발생과 소년가장들처럼 나이의 차별에서 오기도 하며, 한국의 농민들처럼 국제무역의 파동에 따라 어쩔수 없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는 또 몇 십년간 종사해온 산업분야가 사양화 된다든가 기업이 문을 닫거나 감원을 하는 경우, 인간관계의 불협화음이나 가난함의 상속 등등 개인적인 능력 문제라기 보다는 사회 ‧ 제도적인 문제라고 파악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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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민주국가에서 더 이상 극빈자들을 방치하는 것은 죄악이며, 국가자체의 존립 의의 마저 찾아볼 수 없는 무능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아프리카 등지의 빈국의 경우에는 GNP(국민총생산) 자체가 너무도 적어 이같은 사회를 당장 실현시킬수 없다고 해도, 1인당 GNP가 1만달러에 가까운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이 많다는 현실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회정의의 몰락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과 같은 조건을 갖춘 국가에서야말로 집권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손쉽게 극빈자가 한사람도 없는 국가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국가가 소득이 없는 국민에게 『세대주분배금』을 지급하면 모든 문제는 즉각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나라의 1인당 GNP를 1만달러로 계상하면, 한가구당 (5인기준) 월평균 생산액은 약 500만원(1만달러×5인÷12달)이 된다. 「세대주분배금제도」는 이같은 국부(國富)를 바탕으로 해서 소득이 전혀 없는 세대주에게 가구당 GNP의 5분의 1수준인 100만원을 지급하되, 가족중 30만원의 수입이 있으면 70만원을 지급하고 가족이 3인이라면 20만원을 공제한 80만원을 지급하는 제도다.
특히 세대주분배금은 공직자를 거치지 않고 세대주가 은행에 신청만하면 무조건 지급 받을수 있도록 해야한다. 공무원을 거치면 돈은 찬물에 X가 줄어들 듯 작아져서 결국에는 돈은 가난한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또 이 제도는 분배금의 수령권자를 세대주로 제한함으로써 가정을 보호할 수 있으며, 수혜의 차원이 아니라 천부적인 기본 권리로 확정함으로서 서구(西歐)제국의 복지제도와는 근본을 달리해야 한다.
이렇게 될 경우 우리나라는 가난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단군(檀君)이래 최초의 이상국가를 실현시킬 수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축복받는 단일민족국가로서 그 국력이 무한대로 뻗어날 것이다.
누가 몰라서 안하는 것이냐?
그렇게 할 예산이 없어서 못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괜히 희한한 생각이나 해낸 듯이 떠벌리고 있다고 미소(?)짓는 일부 현학자들이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같은 반응이야말로 안일무사와 이기주의의 극치다.
이들은 국민과 현장에 있는 서민들의 제언을 가능한 한 수용치 않으려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개혁을 위해서는 결코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려하지 않는 당나귀와 같다.
예산이 없어서 세대주분배금제도를 실현시킬 수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IMF당시 소위 재벌그룹들이 탕진한 1백조원이 넘는 돈을 정부가 공적자금으로 갚아주고 있는 판에 예산이 없다는 말이 도대체가 말이 되는가? 우리나라 예산의 10%만 세대주분배금으로 할애해도 국가 존립의 으뜸 목적인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국가를 이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서 한국은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가 될 수 있다. 12조원을 매년 투입하면 100만명의 세대주에게 월 100만원씩 세대주분배금을 지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국민의 12%인 500만명이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별도의 소득이 조금 있거나 국가 지방자치단체가 이들 극빈세대의 고용촉진을 위해 행정력을 집중할 경우 연간 예산은 7∼8조원 이하로 줄어들 소지도 충분히 있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점은 이같은 세대주분배금은 국민경제가 투입하는 모든 자금중 가장 투자효과가 크고 확실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세대주분배금은 배분과 동시에 거의 전액이 소비됨으로서 자본회전율이 여타자금에 비해 수십배나 빠르다. 정부는 댐을 건설하거나 도로 항만을 건설하는데 매년 수십조원을 투입하지만, 이들 자금의 회전율은 빨라야 2∼3년, 늦으면 10여년을 넘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세대주분배금은 하루만에 은행으로 되돌아 오거나 늦어도 한달안에는 전액 회전되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세대주분배금으로 정부가 만약 12조원을 투입한다면, 그 파급효과는 100조원, 500조원으로 확대되면서 국민경제에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게 되는 것이다.
물론「세대주분배금」제도는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불만을 초래하고 가난뱅이들이 모두 놀고 먹으려는 그릇된 사회풍토를 조성할 것이라고 지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같은 걱정은 『가난한 사람들은 돈에 대한 욕심도 없다』는 정신병자 같은 논리다. 돈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특히「세대주분배금」은 5인가족이 굶어죽지 않고 발가벗지 않으며, 잠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이므로 이것을 가지고 불만을 갖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바로 한 가정에서 공부를 못한다고 밥을 굶기며,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옷을 안입히거나 못생겼다고 길거리에 쫓아내서 동사시키는 가장(家長)과 별로 다른 종류의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한 나라를 구성하는 동등한 국민으로서 최소한의 생존권인 의식주의 해결을 국가가 담당해 주는 것을 부당하게 생각한다면 민주국가의 기본권인 정치적 평등권이나 병역의무 같은 개념도 타당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세대주분배금은 국가가 지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극빈자들이 대부분 굶어죽어 버리는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세대주분배금으로 지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머리좋은(?) 사람들을 위해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돈을 은행카드로 마련한다. 그 다음에는 친척과 친구에게 또 이웃에게서 이 돈을 마련해서 쓰고 갚지 못한다. 그것도 안되면 가난한 사람들은 인체포기각서(?)를 쓰고 사채업자로부터 이돈을 받아쓰고서는 만신창의가 되도록 얻어 맞는다. 그러나 아직 가난한 가정은 파괴되지 않는다. 부부는 얼싸안고 눈물을 뿌리며 가정을 유지키 위해 발버둥 칠 것이다. 지옥의 사자들도 함께 울 만큼!
용감한 사람은 이제 도둑질을 할 것이고 비겁한 사람은 사기를 칠 것이며, 한심한 사람은 노숙자가 되면서 가정은 파괴되지만, 정작 세대주분배금으로 지급하는 돈은 여전히 국민경제가 부담해야 한다.
도둑놈과 사기꾼을 잡아들이기 위한 경찰과 공무원들에게 봉급을 주어야 하며 이들을 잡아서 가둘집과 음식물과 옷가지와 그리고 감시인원도 필요한 것이고, 노숙자가 길거리에서 죽으면 이를 화장시켜주는 사람과 비용도 필요하다.
이 모든 비용은 어차피 국민이 지급하는 돈이니 만큼 이를 절약하고 또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그들을 가정이라는 감옥(?)에 묶어두자는 것이 바로 세대주분배금이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생존권은 진실을 말하면, 법이나 국가에 앞서는, 동식물도 누리는 천부의 권한이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치안국가에서는 극빈자들에게는 그것은 생존권을 짓밟는 무서운 괴물이 되기도 한다.
움막이나 판자집이라도 세워서 거처를 삼아야 하겠는데 공권력은 이를 잔인하게 때려 부수는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의 이유는 도시미관을 저해하기 때문이라지만, 다람쥐나 새집은 오히려 공원에서조차 용납되고 있음을 볼때, 누가 감히 이들 극빈자들이 동물보다도 못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목화를 심거나 들짐승을 사냥해서라도 옷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경우 법(法)은 이를 철저히 응징한다.
추위를 막기 위해 나무를 베면 감옥에 보내져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한다. 동물들도 가족과 헤어지면 슬피 우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 모든 제약은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결과만을 놓고 볼때, 국가의 존립에 따른 제약이며, 이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은 동식물도 누리는 천부의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것이 사실이다. 「세대주분배금」은 이처럼 국가가 존립함으로서 불가피하게 침해당하는 인간들의 생존권을 되돌려 준다는 차원의 제도임으로 그것은 시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 간주되어야 한다.
세대주분배금, 이것이야말로 세금은 없어져도 인간사회에서 반드시 존속되어야 할 사회계약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실제로 자원봉사자들 만으로도 조직되어 운영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생존권은 국가가 있건 없건 당연히 존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대주분배금제도는 이처럼 국가제도와 도덕을 초월하는 천부의 권리인 까닭에 이제 어떠한 반대의견이나 지연이유도 성립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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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대주분배금제도는 현싯점에서, 이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국가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에 중대한 의미가 있다.
우선 이 제도를 채택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이는 국가는 스위스․스웨덴․영국과 같은 기존의 복지국가들이다.
아무리 세대주 분배금제도가 『시혜가 아닌 권리차원』의 제도로서 서구(西歐)제국의 복지제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이제도가 구현되면 지금까지와 같은 노령연금, 실업수당, 공무원 연금 등등 모든 사회보장제도가 대체되거나 빛을 잃을 만큼 월등한 제도이며, 또한 이 제도는 기존의 복지정책의 부작용도 말끔히 해소시킬 수 있는 『21세기의 복제제도』가 틀림없지만, 선진복지국가에서는 당분간 이를 외면할 수밖에 없다고 보여진다.
그 이유는 이들 복지국가들은 이미 50여년 전부터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구현하고 있는만큼,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그만큼 절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존정책에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국가들은 기존의 복지정책에 대해 모든 국민이 자부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제도를 환영할 것 같지도 않다.
미국처럼 흑백갈등이 심한 나라들도 세대주분배금제도의 도입에 많은 제동이 걸릴 것 같다. 인종차별이나 종족갈등은 좀더 인간성의 본질적인 문제로서 결코 백인은 흑인을 위해, 그리고 이 민족은 저 종족을 위해 세금을 내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프리카 등지의 극빈국은 근본적으로 부(富)가 축적되지 못한 관계로 세대주분배금제도를 구현할 수 없다.
결국 한국만이 단일민족이라는 장점과 경제적 풍요, 그리고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하다는 현실도, 21세기의 복지제도를 추진하는데 있어서는 더할나위 없는 조건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하루빨리 세대주분배금제도를 도입함으로서 세계 최고의 복지사회를 구현하는 동시에 인류의 찬란한 미래를 열어나가는 주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이 이 제도를 정착시키면 어떠한 축복이 있을 것인가?
첫째로 배달민족의 국가제도는 과거 5천년간 대체로 나쁜 제도였으나 비로소 좋은 제도가 된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이는 역사상 최초로 극빈자가 한사람도 없는 사회가 이룩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망에서의 탄식이지만…,『산 목에 거미줄 치랴!』와 같은 고약스런 속담이 없어질 것이며, 우리말 사전에 「동냥」이란 단어도 고어로 취급될 것이다.
참으로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신체불구자들의 그 처참한 광경이 없어지는 것은, 그들도 인간으로서의 생존권, 즉 세대주분배금을 지급받기 때문이다.
소년가장의 피맷힌 원한과 양로원의 노인들에게서 슬픔의 눈물이 거두어질 것이다. 실직한 젊은이의 광적인 분노가 사그러들 것이며 고아들도 따뜻한 엄마를 만나게 되리라. 정신병자나 정박아도 구제되고 과부들의 슬픔도 감싸지는 사회가 이룩되는 것이다.
둘째로 세대주분배금제도가 실행되면 우리사회는 곧바로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는 누구나 최소한의 생존권이 보장됨으로서 우리사회에서 굴종의 인간관계가 종식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협력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사실 봉급장이들은 속으로는 상급자들을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 하면서도 겉으로는 해맑은 미소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하나의 성인으로서의 인격을 내팽긴 채 수천번의 굴종과 절망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같은 삶이 어떻게 해서 『홍문에 숯불을 달고 뛰어야하는 인생』이 아니란 말인가?
아첨과 독선, 학맥과 집단이기주의 , 그리고 인맥과 지역감정, 이런것들이 옳치않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봉급장이들은 이것들에 매달리지 않고서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는 현실을 무섭도록 채득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가 이것들을 붙잡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사회는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평등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 공염불에 불과한 일이라고 간주된다.
셋째로 세대주 분배금제도가 도입되면 국민생산력이 무한대로 커져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로 우뚝서게 된다.
이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세대주분배금의 엄청나게 빠른 자본회전율에 따른 투자효과에도 그 이유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 제도가 국민 모두에게『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을 때에, 하고 싶은 곳에서 할 수 있도록』하는 바탕을 제공함으로서, 노사간의 산업평화 따위의 개념이 아니라 모든 근로자들이 진정으로 즐거움 속에서 자발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가 이룩되기 때문이다.
1930년대부터 인류 최초로 복지제도를 채택했던 스웨덴 ․ 스위스 ․ 노르웨이 ․ 덴마크 등이 그 이후 오늘날까지 수십여년간을 세계에서 1인당 GNP 1위 ∼ 10위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배경과 비결은 무엇인가?
이는 바로 복지정책이 온 국민의 화합과 생산능력을 무한대로 끌어 올린 결과에 기인할 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후진국 정치지도자들은 이와같은 엄연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복지정책하면 영국병(英國病)만을 거론하길 좋아하지만, 복지정책과 영국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새로 배워야 할 것이다.
영국병은 복지정책서 비롯된 경제적 파탄이 아니라 실제로는 전세계의 식민지로부터 오던 부(富)가 단절되면서 겪어야했던 영국특유의 어려움이었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을 뿐이다.
또 일본사람들을 『경제적동물』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이는 질시에서 나온 음해일뿐, 복지정책이 가져다준 『국민적 화합』이라는 선물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같이 너무나 알기쉬운 경제논리가 외면된채 아직도 일본과 일본인을 연구하는 각종 도로(徒勞)들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은 정말로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넷째로「세대주 분배금」이 지급되면 한국에는 범죄가 없어지는 사회가 된다.
왜냐하면 한국사람들은 생존권을 위협받지 않는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생명과 신체의 자유를 저당잡히는 모험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경우 범죄는 사실에 있어서 그 99%가 가난으로부터 연유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한낱 정신질환자의 몫에 불과하다.
스웨덴이나 덴마크처럼 자살이 늘어날지는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최소한 일본처럼 조직폭력배는 늘어나지 않을 것같다. 일본의 조직폭력은 사실은 국가가 눈감아 주고 있는데(?)에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일본의 조직폭력은 「사무라이」의 후예임을 자처하는데, 「사무라이」는 바로 일본인들이 민족문화로 자랑하고 있는 무사도정신이 아닌가?
이같은 맥락에서 세대주분배금제도가 실현되어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자나라가 된다면, 한국에는 옛날처럼 무수히 많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나타나지 않을가 웃음이 절로 난다.
다섯째로 한국에서 「세대주분배금제도」가 정착되면, 우리나라는 가장 천국을 닮은 사회가 이룩됨으로서 전세계적으로 물질과 정신문화의 종주국이 될 것이다.
세대주분배금제도의 시행에 따라 가난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국가가 성취되면, 상식과 정의가 통하게 되며, 범죄가 자취를 감추면서 한국인들의 능력이 무한대로 뻗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개인적으로 우수하다는 사실은 이미 전세계가 인정하고 있으며, 실제로 초등학생의 경우 그 지능과 학업능력이 세계 1위임은 세계적인 조사기관에 의해 여러번 입증된 일이다. 이는 가장 우수한 자질을 가진 한국인들이 정의스런 사회에서 올바른 교육을 받을 경우… 경제적인 능력은 물론이려니와 과학․기술․문화․예술․체육 등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음을 입증하는 데이터인 것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이 21세기의 찬란한 지구문명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의 바탕은 세대주분배금제도의 도입 여부에 달려 있다고 확신하면 또한 한국이 이 제도를 세계최초로 도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왜냐하면, 한국이 이 제도를 도입하는데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서구(西歐)제국과 일본 등이 1인당 GNP가 몇천달러도 못되는 가난속에서도 복지제도를 도입함으로서 세계 최고의 풍요를 이루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함께 이제 우리나라의 지도층도 내 것을 소중히 여기며 큰 지혜를 사랑하는 현명한 사람들로 바뀌는 일대 사회혁신이 소리없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외국저명인사의 견해가 아니면 수용하려 들지 않거나 국민의 의견은 물론 자기자신의 빼어난 식견조차, 스스로 업신여기는 의기소침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한국의 지도층이 원래의 자질대로 큰지혜와 사랑을 바탕으로 현재를 건설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위대한 지도자들로 새롭게 태어나며, 온 국민이 이에 뜨겁게 화합하고 용해되는 벅찬 감동의 시대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