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정도, 절제와 품격”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선뜻 쓰겠다고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우선 무슨 내용으로 글을 써야할지 막막했고, 이제 검사로서 임관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내가 일천한 나의 수사 경험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원칙과 정도, 절제와 품격”을 논한다는 것이 너무 민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달에 유난히 벅차게 느껴지는 미제의 압박이 나를 더욱 부담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그 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다.
“원칙과 정도, 절제와 품격”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작년 2월23일 법무부에서 임관식을 마치고, 중앙지검에 전입신고를 할 때였다. 당시 검사장이셨던 임채진 총장님께서 전입 검사들의 신고를 받으시면서 우리 검찰이 절제와 품격 있는 수사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 때 나는 검사로서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설레임에 들떠 있었고, 그 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다.
검사로서 근무한 지난 1년8개월 동안 사건처리를 하면서 내 나름대로 보람도 느꼈지만, 매일 검사실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가끔 회의도 느꼈다.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상대방에게 모든 잘못을 떠넘기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사람들이 싫어지기도 하고, 또한 불신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건을 수사하면서 사건관계인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기 위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실체를 파헤치고 법집행을 하는 검찰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다루어야 하는 기관이다. 증거를 수집하면서 우리는 여러 사건관계인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증거를 찾아나가면서 실체를 조금씩 발견한다. 결국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출발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검사실을 찾아오는 사건관계인들 역시 검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이를 충분히 고려하여 사건을 판단하였다고 느꼈을 때 자신에 대한 처분에 승복할 것이다.
올해 초에 나는 한 대학 후배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오랫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후배의 아버지가 어떤 형사사건에 연루되어 검찰에서 조사를 받게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배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다가 마지막에 씁쓸한 말 한마디를 했다.
그 후배의 아버지는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는데 검찰에서 이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귀찮다는 듯이 할 말이 있으면 진술서로 써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후배가 나에게 검찰은 원래 다 그러냐고 물어보았다. 그 순간 나는 내 자신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수많은 사건과 씨름해야 하고, 수많은 사건관계인들의 진술을 들으면서 그 말을 믿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해야 하는 검찰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진술 내용을 서면으로 정리해서 제출하면 검찰이나 사건관계인 모두에게 더 편리하고 효율적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조사하는 사람의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피의자의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검찰청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었고, 어찌 보면 일생에 한번 있는 경험일 수도 있다. 형사사건으로 조사를 받기 위하여 검찰청에 출입하면서 그 동안 쌓아왔던 주변 사람들의 믿음과 존경,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한순간에 무너진다고 느낄 것이다. 검사에게는 업무의 연장선상에 있는 수많은 사건의 하나일 뿐이지만 그 피의자에게는 자신의 인생이 걸려 있는 가장 중요한 순간일 것이다.
사람의 죄책을 묻고 형벌을 부과하는 우리 검찰이 그러한 피의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은 결국 그 피의자에게 자신의 사정을 말할 기회를 주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책임을 추궁함에 있어서도 ‘절제와 품격’을 지키는 것이 결국 ‘원칙과 정도’에 부합하는 사건처리가 아닌가 싶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우리 검찰을 비판하거나 때로는 비난하는 기사나 보도를 볼 때마다 나는 언론기관이 우리의 업무, 근무 여건이나 검찰청을 찾아오는 사건관계인들의 모습·태도 등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쉽게 단정짓는 것이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역으로 과연 나는 얼마나 나를 찾아왔던 사건관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이해했고, 그 사람의 입장을 생각했을까.
사람을 강제로 출석시켜서 조사를 하고, 그 책임을 추궁하며, 형사처벌까지 하는 우리 검찰은 정말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이다. 그렇다보니 국민들은 우리의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검찰이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의 앞에서 법의 엄정함을 보이면서도 사건관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에는 더욱 신중하고, 그들의 입장을 배려할 수 있는 섬세함까지 갖추어야 한다.
결국 ‘절제와 품격’ 있는 수사만이 사건관계인들로 하여금 우리가 내린 결정에 대해 승복할 수 있도록 하는, ‘원칙과 정도’에 부합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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