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故장용갑선생
최익현 선생의 후손인 독립기념관 최창규 전 관장이 존경의 뜻으로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를 받드는 의미로 '강평일화 최창규'라고 새겨진 역사적 지갑을 선물 받아 독립유공자의 혼을 후손대대로 전해지고 있다.
장하공의 후예-학생민족 운동 주동자-6.25때 민선으로 충남홍성 은하면 인민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전국 3천여 개 면 중 단 1명도 안 죽도록 세기의 지혜와 리더십을 발휘, 기적의 은하면을 만들었던 이 시대 진정한 독립운동가가 있다. 그래서 훗날 홍성에 하늘이 내린 천사로 통하는 위인이 있다. 바로 항일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자존감 하나로 올곧게 살아가며 지역사회 빛과 소금이 되고있는 장재설 장로의 아버지, 장용갑 선생이다.
장용갑 선생은 나라의 정신을 대변하는 예산역사연구소, 흥주향토문화연구소 등에서도 독립유공자 명단에 반드시 신속히 올라야 함이 강조되고 있고, 일제시대 항일에 앞장섰기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회 범3.1운동 유공자대회 초청 참석, 최익현선생 제사 때도 항시 참석하기도 했는데, 최근 국가보훈처에서 수많은 신빙성있는 증거자료와 자체적으로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긍정검토 내년 광복절 계기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 부의 할 예정으로 그 동안의 가슴의 한을 씻고 내년엔 반드시 진정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날이 올 것으로 기대된다.
장 선생은 최고의 수재로서 결성향교에 몸담아 향교 장의 노릇도, 유림들과 함께 지내왔고 면암 최익현, 만해 한용운, 백야 김좌진 장군, 등 선열들의 애국충절의 얼을 항상 가슴에 담고 민족정신을 이어받아 투철한 국가관과 사명의식에 국내에서 의열운동과 민족운동을 함께 하였다.
또한 김구주석공실 비서 신현상 선생과 8.15광복 직후의 국내정세 상황을 논하고, 국내의 암울한 정세에 나라를 걱정했던 진정한 민족운동가이다. 선생의 소장 유품 중 특이한 것은 김구선생의 판공실장(비서) 이었던 신례원 출신 일연(一鳶) 신현상(申鉉商1905∼1950) 선생의 답장편지였다.
장용갑 선생이 김구 선생에게 쓴 편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답장편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신현상 선생은 1930년 위조환증으로 호서은행에서 독립자금 5만8000원의 거금을 인출했던 항일의사였고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유해국내봉안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편지를 통해 겨레와 나라의 진로를 걱정하고 자주주권국을 염원했던 이웃 홍성에 사는 장용갑 같은 인물이 있다는 것에 일연선생은 든든한 애국동지로 생각했다.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치열하게 살다간 많은 열사의 이야기를 접한다. 알려진 인물은 그나마 보훈의 혜택을 받지만, 의당 받아야 할 인물은 이념의 벽으로 재단되어 그늘속에 묻혀있다. 그러니 영웅도 제대로 시기를 타고나야 영웅 값어치를 하고, 열사도 열사 대접을 받는 다는 것이 통념적인 말이 됐다. 해방 후 예산에 두 번 오셨던 백범 김구선생도 그랬고, 신양출신 남로당 박헌영 선생도 그랬다. 어디 그분들 뿐이랴. 장용갑 선생의 구술기록을 하며 정리하다 보니 지역에서 일제식민지시대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고 옥고를 치르면서도 정당성을 당당하게 주장하여 조금도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선생의 삶에 큰 감화를 받는다. 세상이 몰라줘 후손들이 북받치는 눈물로 평생을 살고 한탄해도 하늘이 인정하는 영원 한 독립유공자인 장용갑 선생을 재조명 해봤다.
사진은 1932년 산사에서 은밀히 선생님도 모르게 항일운동을 주도하는 홍성공업전수학교시절 독립운동동지 단체모임 사진으로. 장 선생을 비롯 11명학생중 10명이 독립운동 발각으로 퇴학조치 되었다.
사진속의 이 시는 역사적으로 아주 소중하고 의미 깊은 시다. 뜻 깊은 사찰/ 등지는 젊은이 /한 떨기 모란꽃 /버리기는 서러워/
민족의 운명을 대신 할 난세의 영웅이 될 대표 학생들이 뜻 깊은 사찰에 모여 항일 운동을 주도했는데 모란꽃은 임금님 병풍도 모두 모란꽃으로 장식 될 만큼 꽃 중의 꽃으로. 고진 탄압 속에 한줄기 빛으로 숨 쉬고 있는 숭고한 민족정신과 우리기상을 의미하고 우리 자주독립을 버리기는 죽기보다 싫다는 가슴 절절한 영혼을 시로 표현 그 당시 독립 유공자로서의 가슴을 새기고 있다.
장 선생은 성인이 된 후 인민위원장을 맡아 전병석 홍성경찰서장, 홍세기 해경총장, 전용안 국회의원출마자등등 우익인사와 선량들이 공산만행의 살생부에 기록된 우익인사 1백 여 명의 목숨을 극적으로 구출, 인간의 존엄성을 살리는 미덕을 쌓았지만 6.25의 전쟁속에서 부역이란 오명에 덫을 달게 되어 빛을 보지 못한 채 안타깝게 비운의 길이 가로 놓여졌다. 하지만 진리란 그를 쇠사슬에 묶어놓지는 못했다. 경찰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자신들의 목숨을 구제해준 장용갑 선생의 은공을 잊지 못한 군민 우익 수 많은 저명인사들의 혈서로 장 선생을 구제하려는 보증을 받고, 홍성경찰서에서 풀려나는 감동도 있었지만 반공을 국시로 삼는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이미 예비검속자로 분류된 선생에게 빨갱이란 올가미 덫은 오랫동안 따라다녔다.
급기야 1975년 민주열사 고문탄압과 인권유린의 대명사인 '긴급조치법9호' 위반으로 5년형을 받고 고법에서 집행정지로 9개월만에 출옥 복권되었다. 출옥 후 선생은 자신의 삶은 "사심없는 순수한 애국심에서 감행되었다"고 울분으로 호소했지만, 사람들의 후문은 그리 관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故장용갑 선생의 후손 장재설 장로는 신원회복을 위해 모든 삶을 버리고 평생 땀 흘린 결과 얼마 전 법원으로 38년만에 '긴급조치' 위반 무죄 판결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렇듯 장 선생은 반일사상으로 독립·민족운동가로 공산당이 아닌 보훈의 대상인 것이다. 반일운동, 반중운동 등등 민족주의자이자인데 6.25당시 민선으로 인민위원장을 부역했다고 감옥생활과 빨갱이로 묶어두고 있서 후손인 장재설 장로가 국가적 대우는 커녕 사회적 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나가며 굳건히 아버지의 고귀한 뜻을 이어가고 있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역사, 그리고 진정한 복권 '대한민국 28년 2월 16일 주석판공실비서 신현상'이라 쓰고 뚜렷한 관인이 찍힌 답변서로 소중한 곳에 깊숙이 보관돼오다 65년 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대한민국 28년이면 1946년이다. 이때는 상해에서 백범일행이 환국 후 3개월도 안돼 국가정세가 미군정 아래 있어 한치 앞을 내다 볼 수없는 혼탁의 정세였고 좌우익간의 대립으로 국내사정은 험악하게 돌아갈 때다. "선생의 귀한 뜻을 주석께 전달했으며 함께 새 나라건설에 공동분투하고… 좌우병력진전이 매우 다행스럽다."는 내용으로 볼 때 장용갑 선생이 백범에게 민족적 큰 틀 속에서 남북분단을 막아내고 좌우익갈등을 해소하여 독립국가건설을 촉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백범 김구선생 비서실장 신현상 선생께서 장용갑 선생에게 보낸 편지내용을 되새겨보면 백범 선생과의 사이에 나라를 걱정하고 남북분단을 막아내고자 노력한 점을 확신한다. 아버지의 필적등 오랜 역사적 유품을 간직해온 막내아들 장재설 장로의 효심은 장 선생의 열정과 애국심에 따른 집념의 상징으로 한국인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장 선생은 일본의 침략야욕이 병합으로 구체화 되던 한일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6월 27일 홍성군 서부면 판교리에서 태어나 판교리에서 문맹퇴치 운동 등을 전개, 헌신했고 홍성군 상이복지회 회장을 하는 등 의분 강직한 성품으로 암울한 현실을 체득하면서 내포지역 유일한 공업계 학교인 현재 한밭대학교 전신 '홍성공업전수학교' 재학중 퇴학조치 되었다. 졸업 전 '광주학생의거사건'이 일어나자 '피도 조선!뼈도조선!넋도 조선!...' 이라는 민족적 분개한 뜻을 시로 적어 배부한 일로 왜경에 체포, 고문을 당했고 '만보산 사건' 때에는 학내데모주동자로 배외투쟁을 하다가 왜경에 피검되어 60일 가까이 수차례 구금되어 고초를 겪었는데, 한밭대학교 학생지원센터에 당시 60일 가까이 출석은 하였으나 질병 아닌 사고 등으로 결석처리 된 기록자료가 현재 보관되고 있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공부나 개인의 꿈보다 민족과 조국의 독립에 대해 늘 목말라 했다. 동시에 한번 세운 뜻은 정대 꺾는 법이 없었으며 청렴했는데 그 당시 천도교신문에 '고집쟁이 장용갑 천도교에 입교하다'라는 타이틀이 나올 정도이다. 또한 경남선(장항선) 철도사장이 일제와 결탁운영하는 결성금광 사건에 항의로 서부면민 1천여명 강제징용반대서명운동을 펼쳐 총독부와 4년간 투쟁하기도 했다. 만보산사건 이후 반중사상이 고조 되던 때, 애국심이 강했던 청년 장용갑이 중국인이 운영하던 호떡집에 불을 놓으며 항의를 했는데 호떡집이 허둥지둥 좌충우돌하는 해프닝을 만들었고 이때부터 '호떡집에 불났느냐'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고 이 말이 관용어로 쓰이게 된 것은 이목을 끄는 유래다.
또한 옷고름이 길면 등산할 때 작업 할 때 불편하니 개량한복을 입어야 된다고 각 신문에 최초로 기고해서 지금의 개량한복이 탄생했다는 일화와 애국지사의 정신을 흐리지 않기 위해 노름과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던 장 선생의 남다른 애국심은 상주장을 치를 때에 만장을 온전히 한글로만 만들어 유림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특별한 한글사랑으로 가슴을 뜨겁게 하는 애국심은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고 독립운동가로서의 숭고한 길은 가족이 아닌 역사전문가 비롯한 지도자들과 국가차원에서 밝혀 내야할 중요한 대사이다.
< 사진 > 왼쪽에서 두번째 서있는 학생이 장용갑 선생의 모습 (끝)
출처 : 동아이코노믹 보도자료
최익현 선생의 후손인 독립기념관 최창규 전 관장이 존경의 뜻으로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를 받드는 의미로 '강평일화 최창규'라고 새겨진 역사적 지갑을 선물 받아 독립유공자의 혼을 후손대대로 전해지고 있다.
장하공의 후예-학생민족 운동 주동자-6.25때 민선으로 충남홍성 은하면 인민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전국 3천여 개 면 중 단 1명도 안 죽도록 세기의 지혜와 리더십을 발휘, 기적의 은하면을 만들었던 이 시대 진정한 독립운동가가 있다. 그래서 훗날 홍성에 하늘이 내린 천사로 통하는 위인이 있다. 바로 항일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자존감 하나로 올곧게 살아가며 지역사회 빛과 소금이 되고있는 장재설 장로의 아버지, 장용갑 선생이다.
장 선생은 최고의 수재로서 결성향교에 몸담아 향교 장의 노릇도, 유림들과 함께 지내왔고 면암 최익현, 만해 한용운, 백야 김좌진 장군, 등 선열들의 애국충절의 얼을 항상 가슴에 담고 민족정신을 이어받아 투철한 국가관과 사명의식에 국내에서 의열운동과 민족운동을 함께 하였다.
또한 김구주석공실 비서 신현상 선생과 8.15광복 직후의 국내정세 상황을 논하고, 국내의 암울한 정세에 나라를 걱정했던 진정한 민족운동가이다. 선생의 소장 유품 중 특이한 것은 김구선생의 판공실장(비서) 이었던 신례원 출신 일연(一鳶) 신현상(申鉉商1905∼1950) 선생의 답장편지였다.
장용갑 선생이 김구 선생에게 쓴 편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답장편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신현상 선생은 1930년 위조환증으로 호서은행에서 독립자금 5만8000원의 거금을 인출했던 항일의사였고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유해국내봉안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편지를 통해 겨레와 나라의 진로를 걱정하고 자주주권국을 염원했던 이웃 홍성에 사는 장용갑 같은 인물이 있다는 것에 일연선생은 든든한 애국동지로 생각했다.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치열하게 살다간 많은 열사의 이야기를 접한다. 알려진 인물은 그나마 보훈의 혜택을 받지만, 의당 받아야 할 인물은 이념의 벽으로 재단되어 그늘속에 묻혀있다. 그러니 영웅도 제대로 시기를 타고나야 영웅 값어치를 하고, 열사도 열사 대접을 받는 다는 것이 통념적인 말이 됐다. 해방 후 예산에 두 번 오셨던 백범 김구선생도 그랬고, 신양출신 남로당 박헌영 선생도 그랬다. 어디 그분들 뿐이랴. 장용갑 선생의 구술기록을 하며 정리하다 보니 지역에서 일제식민지시대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고 옥고를 치르면서도 정당성을 당당하게 주장하여 조금도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선생의 삶에 큰 감화를 받는다. 세상이 몰라줘 후손들이 북받치는 눈물로 평생을 살고 한탄해도 하늘이 인정하는 영원 한 독립유공자인 장용갑 선생을 재조명 해봤다.
사진은 1932년 산사에서 은밀히 선생님도 모르게 항일운동을 주도하는 홍성공업전수학교시절 독립운동동지 단체모임 사진으로. 장 선생을 비롯 11명학생중 10명이 독립운동 발각으로 퇴학조치 되었다.
사진속의 이 시는 역사적으로 아주 소중하고 의미 깊은 시다. 뜻 깊은 사찰/ 등지는 젊은이 /한 떨기 모란꽃 /버리기는 서러워/
민족의 운명을 대신 할 난세의 영웅이 될 대표 학생들이 뜻 깊은 사찰에 모여 항일 운동을 주도했는데 모란꽃은 임금님 병풍도 모두 모란꽃으로 장식 될 만큼 꽃 중의 꽃으로. 고진 탄압 속에 한줄기 빛으로 숨 쉬고 있는 숭고한 민족정신과 우리기상을 의미하고 우리 자주독립을 버리기는 죽기보다 싫다는 가슴 절절한 영혼을 시로 표현 그 당시 독립 유공자로서의 가슴을 새기고 있다.
장 선생은 성인이 된 후 인민위원장을 맡아 전병석 홍성경찰서장, 홍세기 해경총장, 전용안 국회의원출마자등등 우익인사와 선량들이 공산만행의 살생부에 기록된 우익인사 1백 여 명의 목숨을 극적으로 구출, 인간의 존엄성을 살리는 미덕을 쌓았지만 6.25의 전쟁속에서 부역이란 오명에 덫을 달게 되어 빛을 보지 못한 채 안타깝게 비운의 길이 가로 놓여졌다. 하지만 진리란 그를 쇠사슬에 묶어놓지는 못했다. 경찰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자신들의 목숨을 구제해준 장용갑 선생의 은공을 잊지 못한 군민 우익 수 많은 저명인사들의 혈서로 장 선생을 구제하려는 보증을 받고, 홍성경찰서에서 풀려나는 감동도 있었지만 반공을 국시로 삼는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이미 예비검속자로 분류된 선생에게 빨갱이란 올가미 덫은 오랫동안 따라다녔다.
급기야 1975년 민주열사 고문탄압과 인권유린의 대명사인 '긴급조치법9호' 위반으로 5년형을 받고 고법에서 집행정지로 9개월만에 출옥 복권되었다. 출옥 후 선생은 자신의 삶은 "사심없는 순수한 애국심에서 감행되었다"고 울분으로 호소했지만, 사람들의 후문은 그리 관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故장용갑 선생의 후손 장재설 장로는 신원회복을 위해 모든 삶을 버리고 평생 땀 흘린 결과 얼마 전 법원으로 38년만에 '긴급조치' 위반 무죄 판결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렇듯 장 선생은 반일사상으로 독립·민족운동가로 공산당이 아닌 보훈의 대상인 것이다. 반일운동, 반중운동 등등 민족주의자이자인데 6.25당시 민선으로 인민위원장을 부역했다고 감옥생활과 빨갱이로 묶어두고 있서 후손인 장재설 장로가 국가적 대우는 커녕 사회적 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나가며 굳건히 아버지의 고귀한 뜻을 이어가고 있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역사, 그리고 진정한 복권 '대한민국 28년 2월 16일 주석판공실비서 신현상'이라 쓰고 뚜렷한 관인이 찍힌 답변서로 소중한 곳에 깊숙이 보관돼오다 65년 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대한민국 28년이면 1946년이다. 이때는 상해에서 백범일행이 환국 후 3개월도 안돼 국가정세가 미군정 아래 있어 한치 앞을 내다 볼 수없는 혼탁의 정세였고 좌우익간의 대립으로 국내사정은 험악하게 돌아갈 때다. "선생의 귀한 뜻을 주석께 전달했으며 함께 새 나라건설에 공동분투하고… 좌우병력진전이 매우 다행스럽다."는 내용으로 볼 때 장용갑 선생이 백범에게 민족적 큰 틀 속에서 남북분단을 막아내고 좌우익갈등을 해소하여 독립국가건설을 촉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백범 김구선생 비서실장 신현상 선생께서 장용갑 선생에게 보낸 편지내용을 되새겨보면 백범 선생과의 사이에 나라를 걱정하고 남북분단을 막아내고자 노력한 점을 확신한다. 아버지의 필적등 오랜 역사적 유품을 간직해온 막내아들 장재설 장로의 효심은 장 선생의 열정과 애국심에 따른 집념의 상징으로 한국인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장 선생은 일본의 침략야욕이 병합으로 구체화 되던 한일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6월 27일 홍성군 서부면 판교리에서 태어나 판교리에서 문맹퇴치 운동 등을 전개, 헌신했고 홍성군 상이복지회 회장을 하는 등 의분 강직한 성품으로 암울한 현실을 체득하면서 내포지역 유일한 공업계 학교인 현재 한밭대학교 전신 '홍성공업전수학교' 재학중 퇴학조치 되었다. 졸업 전 '광주학생의거사건'이 일어나자 '피도 조선!뼈도조선!넋도 조선!...' 이라는 민족적 분개한 뜻을 시로 적어 배부한 일로 왜경에 체포, 고문을 당했고 '만보산 사건' 때에는 학내데모주동자로 배외투쟁을 하다가 왜경에 피검되어 60일 가까이 수차례 구금되어 고초를 겪었는데, 한밭대학교 학생지원센터에 당시 60일 가까이 출석은 하였으나 질병 아닌 사고 등으로 결석처리 된 기록자료가 현재 보관되고 있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공부나 개인의 꿈보다 민족과 조국의 독립에 대해 늘 목말라 했다. 동시에 한번 세운 뜻은 정대 꺾는 법이 없었으며 청렴했는데 그 당시 천도교신문에 '고집쟁이 장용갑 천도교에 입교하다'라는 타이틀이 나올 정도이다. 또한 경남선(장항선) 철도사장이 일제와 결탁운영하는 결성금광 사건에 항의로 서부면민 1천여명 강제징용반대서명운동을 펼쳐 총독부와 4년간 투쟁하기도 했다. 만보산사건 이후 반중사상이 고조 되던 때, 애국심이 강했던 청년 장용갑이 중국인이 운영하던 호떡집에 불을 놓으며 항의를 했는데 호떡집이 허둥지둥 좌충우돌하는 해프닝을 만들었고 이때부터 '호떡집에 불났느냐'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고 이 말이 관용어로 쓰이게 된 것은 이목을 끄는 유래다.
또한 옷고름이 길면 등산할 때 작업 할 때 불편하니 개량한복을 입어야 된다고 각 신문에 최초로 기고해서 지금의 개량한복이 탄생했다는 일화와 애국지사의 정신을 흐리지 않기 위해 노름과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던 장 선생의 남다른 애국심은 상주장을 치를 때에 만장을 온전히 한글로만 만들어 유림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특별한 한글사랑으로 가슴을 뜨겁게 하는 애국심은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고 독립운동가로서의 숭고한 길은 가족이 아닌 역사전문가 비롯한 지도자들과 국가차원에서 밝혀 내야할 중요한 대사이다.
< 사진 > 왼쪽에서 두번째 서있는 학생이 장용갑 선생의 모습 (끝)
출처 : 동아이코노믹 보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