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위원장은 지난 3월 청와대에서 최소 세 차례에 걸쳐 퇴진을 종용하는 전화를 받았다. 현 위원장은 한때 신변정리를 결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없던 일로 하자”는 전화를 청와대로부터 받고 다시 입장을 바꿨다. 잇단 인사 실패의 난맥상에 따른 역풍 우려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청와대 사퇴 권고 전화’는 현 위원장이 세 번째 전화를 받은 시점에 인권위 상임위원들에게 전화를 받은 사실을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주간경향>은 복수의 인권위 관계자로부터 관련 제보를 받고 취재를 진행했다. 청와대가 현 위원장에게 전화를 건 정황은 야권에도 알려졌다. <주간경향>은 인권위 관계자들에 대한 취재와 민주통합당 진선미 의원이 확보한 제보내용 등의 교차검증을 통해 관련 사실을 확인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청와대는 “인사문제와 관련해서는 확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청와대 사퇴권고 전화 세 차례 받았다”
정치권과 복수의 인권위 관계자로부터 확인한 바에 따르면 현병철 인권위원장이 청와대로부터 사퇴 권고 전화를 받은 사실을 공개한 것은 지난 3월 26일 오전 10시 30분쯤이다. 현 위원장은 세 명의 전체 인권위 상임위원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경위를 설명했다. “2주 전 청와대로부터 ‘거취를 정했으면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금은 대답을 못한다’고 답했고, 청와대 쪽에서는 ‘그럼 내일 다시 전화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 다음날에 다시 전화가 걸려와 ‘정리하셨느냐’고 묻길래 ‘내가 대답할 수 없다. 상의해보겠다’는 취지로 답했다.”
현 위원장이 상임위원들을 소집한 것은 세 번째 전화를 받은 직후다. 현 위원장이 밝힌 바에 따르면 3월 26일 오전 통화에서 청와대 측은 “내주 중 (신임 인권위원장) 내정자가 발표될 것 같다”고 했고 이에 현 위원장은 “청문회 할 때까지만 있겠다”고 답했다.
현 위원장은 이와 같은 경과를 설명한 뒤 상임위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도 덧붙였다. “나는 그만둘 수 없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이 있는데 어떻게 그만둘 수 있느냐. 거기(청와대)서 그런 전화를 해도 되는 거냐. 상임위원들 생각을 듣고 싶다.” 관련 제보를 한 인권위 관계자는 “지난 정부 때 인권위가 독립성 문제로 청와대와 각을 세운 전력이 있어 상임위원들을 내세워 버틸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상임위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인권위 측과 정치권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한 상임위원이 이렇게 말하며 맞섰다. “그렇기는 하지만 위원장의 사퇴와 인권위 독립성은 별개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러나실 거죠?” 현 위원장은 그 상임위원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답했다. “상임위원들과 사무총장, 국·과장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국·과장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3월 26일은 현 위원장에게는 거취문제를 두고 고민한 ‘긴 하루’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오후 4시, 위원장은 다시 상임위원들에게 소집을 통보했다. <주간경향>의 취재 결과 한 상임위원은 소위 관계로 현 위원장의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두 상임위원들 앞에서 현 위원장은 “내가 깨끗이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했으니 아무 말 말라”고 밝혔다. 상임위원들은 현 위원장의 ‘사퇴 결심’과 관련해서 ‘보안’을 지키기로 서로 약속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청와대의 ‘사퇴 권고 전화’는 몇몇 인권위 고위관계자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던 사안이었다.
3월 26일부터 28일 사이, 무슨 일이?
그런데 이틀 후인 3월 28일 오전, 반전이 일어났다. 상임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자리를 파하려는 순간, 현 위원장이 ‘상임위원들에게 잠깐 할 말이 있다’며 위원장 방으로 모여달라고 부탁했다. 현 위원장은 다시 청와대로부터 받은 전화 내용을 공개했다. 현 위원장이 전한 청와대 측의 통보는 다음과 같다. “민정수석의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없었던 일로 하고 계속 업무를 보십시오.”
그 이틀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무렵의 상황 변화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권위 측 제보자의 말이다.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 사퇴(3월 4일),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내정자 사퇴(3월 18일), 김학의 법무부 차관·김병관 국방부 장관 내정자 사퇴(3월 22일) 등 ‘인사참사’가 잇따라 벌어지던 때다. 3월 23일엔 한 언론이 경찰이 민정수석실에 법무부 차관의 성접대 동영상 의혹을 세 차례 보고했지만 묵살했다고 폭로했다. 심지어 곽상도 민정수석이 공식 임명장을 받은 3월 25일에도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내정자가 사퇴했다. 그는 해외에 거액의 비자금을 은닉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아왔었다. 3월 26일은 여당 중진의원들까지 ‘민정수석 용퇴론’에 가세한 날이다.
인권위 사무처 고위 관계자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았다. “인수위 시절이었던 지난 1월 중순, 박근혜 정권의 핵심인사로 알려진 박효종 서울대 교수가 기자간담회에서 인권위 활동을 평가해달라는 질문을 받고 ‘정부가 구성되면 거기에 대해서도 할 것이 있을 것이며, (현 위원장의 거취문제에 대해서) 고민 중’이라고 답한 사실이 이미 있다. 인권위 내부에서는 현 위원장 연임 당시부터 거론되던 L모 교수나 R모 목사 등이 (박근혜 정부의) 차기 인권위원장 내정자라는 소문이 돌던 상황이었다. 이틀 사이에 그런 평가가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청와대에서는 현 위원장에게 수세에 몰린 ‘민정수석’ 핑계를 댔지만, 현병철 교체론과 유임 결정 모두 박심(朴心)이 실린 것이라는 것이 그의 추측이다. 또다른 인권위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현병철은 박근혜 정부로의 정권교체 이전부터 유임 로비에 필사적이었다. 그렇다고 그게 통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잇단 인사 실패로 청와대로서는 인사청문회가 부담되었다. 대통령이 추천한 인물이 줄지어 낙마하는 상황에서, 또다른 후보자를 데리고 와 청문회장에서 결격사유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박근혜 정부는 현병철을 신뢰해서가 아니라 혹시 모르는 인사 실패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인권위 위원장 교체를 보류한 것이다.”
청와대는 현병철 위원장을 결국 신임하게 될까. 현병철 위원장은 2009년 7월 제5대 인권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인권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법으로 정해진 임기는 3년이다. 현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마지막해인 지난해 8월, 6대 인권위원장으로 연임이 결정됐다.
현 위원장, 인권위 독립 이야기할 자격 있나
현 위원장에 대한 신임 여부는 청와대가 언제 업무보고를 받느냐가 일단 시금석이다. 전임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인권위의 편제를 바꾸려다 국제사회 및 시민사회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수 개월을 고집한 끝에 포기했다. 대신 이명박 대통령은 전임 안경환 위원장이 임기 4개월을 앞두고 자진사퇴할 때까지 안 전 위원장으로부터 인권위 업무보고를 받지 않았다.
현 위원장이 밝힌 청와대 전화 내용은 3월 28일 이후 여러 경로로 인권위 직원들에게 알려졌다.
3월 28일 오후 현 위원장은 국·과장들 앞에서 “내 임기 안에 인권교육법이 통과되도록 집중하라”고 발언했다. 3월 29일과 30일 인권위원 워크숍을 거쳐, 4월 1일 현 위원장 때부터 세 달에 한 번씩 진행해온 ‘월례회의’ 자리에서는 “지난해 인사청문회에서 나온 쇄신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하며 국·과장들 앞에서는 “거취에 대해 약속한 간부는 책임지라”는 발언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잇단 발언의 배경을 두고 현 위원장의 ‘거취’와 관련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 직원들의 관심이 쏠렸다. 4월 둘째 주 기자를 만난 한 인권위 관계자는 “(청와대 사퇴 권고 전화사건의) 전모를 아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 하지만 현재 인권위 내에서는 20명가량의 직원들이 관련 사실을 부분적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점에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도 관련 첩보를 입수해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주간경향>은 진선미 의원 측과 각자 확인한 ‘내용’을 바탕으로 3월 26일부터 38일까지 상황을 재구성하고, 복수의 인권위 관계자로부터 현 위원장의 발언 내용을 크로스 체킹했다. 진선미 의원 측은 “3월 26일부터 28일 사이에 진행된 현 위원장의 ‘대(對) 청와대 로비 정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2011년 11월 2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10주년 기념식장 앞에서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현병철 인권위원장의 인권위 독립성 훼손을 비판하며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이날 인권위는 인권활동가들의 입장을 막기 위해 식장 문을 걸어잠근 채 기념식을 진행했다. | 권호욱 기자
“방송문화진흥회가 MBC 김재철 사장을 해임했을 때 우리들은 그 다음 차례가 현병철이라고 생각했다.” 앞의 인권위 사무처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두 사람의 공통적인 문제는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이 아니다. “두 사람이 각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보여준 것은 오랫동안 쌓아올린 기관의 신뢰를, 한 사람의 무능력한 수장이 얼마나 빨리 망칠 수 있냐는 것이었다”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다. 또다른 인권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현병철 위원장을 보면 저 사람이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통 평범한 사람이라면 인사청문회에서 그렇게 뻔히 모욕당할 것이 예상됐다면, 창피를 당하기 전에 스스로 용퇴하는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정권이 바뀌기 전부터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자리 보전이었다.”
복수의 인권위 관계자는 “최근 진주의료원 긴급구제 안건이 상임위원회에서 기각된 것과 관련, ‘공은 자신이 취하고 과는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현 위원장의 스타일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앞의 인권위 관계자의 말. “진주의료원 문제는 현 위원장이 긴급구제 요청을 보고 안건 상정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사안이었다. 거취가 불안정해진 현 위원장이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 정도로 생각하면서도 해당 사안을 맡은 직원들은 일단 안건을 준비했다. 일부 상임위원이 관련 규정을 들면서 긴급구제 대상이 아니라고 하자 거꾸로 현 위원장이 직원들에게 벌컥 화를 냈다. 일을 왜 마음대로 처리하냐고.”
또다른 인권위 직원들은 결국 방문진 이사회의 해임 결의로 MBC 김재철 사장이 물러난 것과 달리, 인권위원장의 인사권자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며 자괴감을 드러냈다. “대선 당시 정권교체가 되길 바랐다. 정권이 달라지면 당연히 현 위원장은 물러날 것이고,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좌절되자 솔직히 멘붕이 왔다. 결국 우리가 아무리 해도 상황에 영향을 미칠 방법은 없는 게 아닐까. 인권위 직원의 90%는 현 위원장이 인권위를 망쳐놨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 그렇지만 지금 대통령의 평가가 우리와 같다는 보장도 없지 않나.”
이 인권위 관계자들은 청와대 전화 압박 논란이 공개되면 ‘독립기관’이라는 인권위의 위상을 현 위원장이 거꾸로 이용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앞의 인권위 사무처 고위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민정수석이 잘못 생각했다’며 인권위원장 교체를 유보했지만, (현병철을 물러나게 하겠다는) 애초의 판단이 맞았다. 불행한 것은 박근혜 정부의 인사 참사다. 인사에서 대실패만 없었더라도 (위원장의 교체는) 추진됐을 것이다.”
진선미 의원은 “지난 정부에서 현 위원장이 임명된 후, 용산참사·
청와대 “인사문제 확인해줄 수 없다”
사실 현 위원장이 공개한 자신과 청와대 사이에 오간 통화 내용과 구체적 경위는 청와대와 현 위원장 양 당사자만이 정확히 밝힐 수 있다. 4월 11일 기자는 신분을 밝히며 현 위원장에게 의견 표명을 부탁했다. 현 위원장은 “모임에 와 있어서 이야기할 수 없다. 미안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기자는 그 후 다시 전화를 걸고 문자메시지를 보내 기사의 취지를 설명했으나 현 위원장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청와대에서 인사 관련을 담당해온 부서는 민정수석실이다. 현 위원장에게 ‘민정수석의 생각이 짧았다’고 한 사람은 누구일까. 정치권에서는 박근혜 정권의 실세로 불리는 청와대 모 고위 관계자라는 추정이 나왔다. 이 고위 관계자는 4월 11일 <주간경향>과 두 차례 가진 통화에서 “개인적으로 현병철 위원장의 전화번호도 모르며, 민정수석이 담당하고 있는 인사문제에 관여한 적이 없는데 왜 자꾸 내 이름이 거론되는지 모르겠다”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인사문제와 관련해서는 어떤 것도 확인해줄 수 없다는 것이 민정수석실의 입장”이라고 밝혀왔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