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민노당 후원’ 교사 공무원 당원 아니다” 판결
“교사들 상당수(122명)가 공소시효 3년이 지나 면소(처벌하지 않고 소송종료) 판결합니다.”
“매달 오천 원에서 이만 원까지 후원금을 내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것은 인정됩니다. 그러나 십만 원도 되지 않는 소액 기부인 것을 감안해 각각 벌금 30만 원과 50만 원을 선고합니다.”
26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대법정에서 숨죽인 채 판결문을 듣고 있던 백 여명 교사들의 입에서 그제야 탄식이 흘러나왔다. 몇몇은 손뼉을 치기도 했고 몇몇은 동료의 손을 맞잡았다. 지난 6개월간 학교 현장에서 이미 죄인처럼 낙인 찍혀 징계·강제 전보를 당해온 교사들의 명예가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법원 “교사들, 민노당 당원으로 볼 수 없다” 무죄 판결
서울중앙지법 형사 23부(홍승면 부장판사)는 26일 정당법·국가공무원법·지방공무원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정진후 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등 교사 및 공무원 122명에 대해 면소 판결하고 12명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후원금 납부로 인한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 등에 대해서는 유죄판결을 내렸으나 검찰의 징역형 구형과 달리 30~50만 원의 벌금형을 각각 선고했다.
사실상 검찰의 완패였다. 애초 검찰은 이들 교사들이 민주노동당(민노당)에 당원으로 가입해 불법 정치활동을 해왔다고 주장해왔으나 재판부는 검찰의 논리를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당수 교사 및 공무원들이 정치자금법을 위반했다는 판결이 나오긴 했으나 이것은 이들이 공개적인 방식으로 후원금을 납부한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예상됐던 판결이었다.
핵심은 정당법상 이들 교사들이 당원인지 아닌 지에 대한 판단이었는데 재판부는 “피고들이 당원으로서의 권리·의무를 갖지 않는 자는 정당에 가입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검찰은 “전교조 교사들이 후원당원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당권을 행사한 당원이었다”고 주장해왔다.
검찰이 민노당 후원 교사들을 기소한 뒤 법원에 제출한 증거자료는 허점 투성이었다. 주요 내용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당우(후원당원)도 당원이다?
|
||||||
민노당은 당원과 당우(후원당원)를 구분해왔다. 당원은 권리와 의무를 함께 지는 당원, 당우는 일종의 후원회원으로서 당권을 행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변호인단은 “검찰이 정당 운영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오해를 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당원 외에 당우를 둠으로써, 공무원 등 정당에 가입할 수 없는 사람들의 정당 후원의 길을 열어놓은 것인데 ‘위장 당원’을 두기 위한 편법이라고 의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당우 제도는 민노당뿐 아니라 민주당의 전신 새정치국민회의 시절에도 운영했던 제도라 정치계에서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재판부는 26일 선고에서 “피고인들의 경우 단순히 후원의 의사로 후원당원이 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러한 지위는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밝히며 ‘당원’과 ‘당우’의 구분을 인정했다. 또 ‘당원과 당우의 권리·의무를 같게 본다’는 민주노동당 당규가 2006년 7월 삭제된 점도 인정했다.
교사들에게 민노당 당원번호가 있었다?
|
||||||
취재진이 입수한 2006년 이전 민노당에서 사용한 ‘가입 원서’ 자료를 보면, 민노당은 당원과 당우를 구분하지 않고 가입 순서에 따라 일련번호를 부여해왔다. 백승우 민주노동당 부총장은 “우리의 편의대로 부여한 일련번호가 당원번호로 오해될만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면서도 “당원번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취재진은 2001년 2월 19일 당시 만 두 살의 나이로 민노당에 ‘2만 번째’ (후원회원으로) 가입한 김선호군을 찾을 수 있었다. 김군은 후원회원에 가입하면서 일련번호 ‘20000’을 부여받았다. 김군의 아버지 김재운씨는 “검찰의 논리대로라면 2살짜리 아들도 민노당원이 된다”며 “일련번호는 당원번호가 아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정당법은 ‘국회의원 선거권이 있는 자만 정당원이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교사들이 민노당 선거사이트에서 투표했다?
검찰은 전교조 교사들이 민노당 투표사이트에서 당직자 선거권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당우가 아닌 당원으로서 권한을 행사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논리였다. 그러나 검찰은 재판과정에서 뚜렷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지난 7일 열린 공판에서 검찰은 재판부에 “투표 사이트 접속 기록은 있으나 투표 행위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고 인정했다. 백승우 민주노동당 부총장은 “투표 사이트는 설문조사용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주민번호만 입력하면 당원과 당우 구분하지 않고 누구나 접속 가능했다”며 “투표 사이트 접속 기록만으로 당원이라고 판단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변호인단은 이날 공판에서 “(당우는) 투표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어 투표를 할 수 없다. 투표 기록은 (있는데) 못 찾는 게 아니라, 존재하지를 않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26일 선고에서 “당우가 당원과 동일한 권리의무를 가졌고 이를 알면서 당우로 가입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 며 피고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불법 정치 자금을 공개된 계좌에 실명으로 이체한다?
|
||||||
현행 정치자금법은 2006년 3월 개정된 법이다. 이전의 정치자금법 3장 6조 1항에서는 ‘후원회’ 항목을 두어 공무원의 정당 후원의 길이 열려 있었다. 기소된 교사들 상당수가 2006년 3월 이전 민노당 후원을 시작했는데 후원 자체는 합법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2006년 3월 정치자금법이 개정돼 ‘후원회’ 항목이 사라졌다. 교사들은 “정당법이 개정된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민주노동당도 “정당법의 후원회 조항이 삭제된 것을 교사들에게 일일이 알리지 못한 것은 당의 실수”라며 책임을 인정했다. 변호인단은 “‘불법 정치자금’을 공개적인 계좌로 실명 이체한 것은 교사들이 정치자금법이 개정된 것을 몰랐다는 증거”라며 재판부에 징역형이 아닌 과태료 처분을 호소했다.
취재결과, 교사들 상당수는 정치자금법이 개정된 2006년 3월 이후에도 민노당에 월 5천 원에서 만원씩 후원한 뒤 국세청으로부터 연말 세액공제까지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또 해당 학교와 교육청 어느 곳에서도 교사들에게 민노당 후원이 정당법 위반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26일 선고에서 “정당에 대한 후원이 불법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해도 정치적 중립의무가 있는 사람들로서 신중함이 요구된다”며 각각 30~5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전교조 “검찰·교과부, 전교조 마녀사냥 중단하라”
민노당 후원 교사들에 대해 법원이 사실상 무죄에 가까운 판결을 내리면서 검찰은 무리하게 기소했다는 비판을, 교과부는 무리하게 교사들을 징계(36명 정직·9명 해직)했다는 비판을 각각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와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는 26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치적인 의도로 검찰이 무리하게 수사를 벌인 것이 드러났다”며 “교과부는 즉각 해직 교사들을 복직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권영국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위원장)는 “정치적 의도를 갖고 시작한 수사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보여준 판결”이라며 “검찰이 당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직 교사들은 모두 백만 원 미만의 벌금형을 받았기 때문에 곧 해직무효소송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성희롱 등으로 1000만원 정도의 벌금을 받은 교사도 정직 혹은 감봉 수준의 징계를 받은 경우가 많아 형평성 논란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재판에 출석한 해직교사 박성애(전 대구 옥산초등학교 교사)씨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검찰과 교과부가 전교조에 대한 마녀사냥을 중단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허재현 기자cataluni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