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 사는 누리꾼 ㄱ씨는 해외에 서버를 둔 사이트로 ‘사이버 망명’을 고려 중이다. 최근 국회에서 통과된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가입자의 접속 기록, e메일, 메신저 등 통신 기록 등 1년 동안의 ‘사이버 생활’ 동선이 고스란히 업체에 보관되고 검찰과 국정원 등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감청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언제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했는지, 어떤 사이트로 넘어갔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에 괜히 위축된다. 생활필수품인 휴대전화도 감청될 수 있고, 특히 위성위치확인 시스템(GPS)의 정보를 통해 반경 5m 이내 범위까지 추적할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개인 전화·e메일·메신저 등 1년간 기록 저장
권력기관 ‘맘대로 감청’… 정치적 악용 소지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4개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중 한나라당 이한성 의원이 내놓은 안이 통과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가상으로 그려본 것이다.
이 법은 모든 전기통신사업자가 △감청 설비를 의무적으로 보유하고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하며 △검찰·경찰·국정원 등 수사기관에 고객의 전화번호 등 통화 내역, 로그 기록 등을 제공하고 고객에게 이 사실을 알려줘야 하며 △1년 범위 이내에서 통신사실 확인자료를 보관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통신사실 확인자료(수사기관이 법원의 허가를 받아 업체에 요청하는 통화 내역이나 로그 기록)의 범위에는 GPS를 통한 위치정보까지 포함됐다. 감청설비를 갖추지 않은 기업은 매년 최대 10억원의 이행강제금을 내야 하고, 자료를 보관하지 않을 때에는 30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한나라당은 지능·첨단 범죄를 잡아내고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 이 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감청 설비를 통해 사실상 유·무선 전화 및 이동전화, 인터넷 전화, 문자 메시지, e메일, 메신저 등 거의 모든 서비스 영역에서 개인 기록이 남고 잠재적으로 감청이 허용되는 셈이다.
특히 통신사실 확인자료에 위치정보를 추가할 경우 시중에 보급된 최신 휴대전화 단말기를 사용 중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디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인터넷기업협회 분석에 따르면 휴대용 인터넷 기기가 일반적으로 보급될 것으로 예상되는 2010년 이후엔 통신사실 확인자료만으로도 실시간 위치추적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이에 대해 “국민의 프라이버시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를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내놓은바 있다.
업체 측에 통신사실 확인자료를 보관하도록 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진보네트워크센터 장여경 활동가는 21일 “범죄사실이 특정되지 않는 일반인에 대해 관련 자료를 1년 동안 저장하게 하는 것은 심각한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문제는 정치적 악용 소지다. 국정원 등 권력기관에 의한 불법 감청 등 오·남용이 이뤄졌던 행태로 볼 때 투명한 감청 집행이 이뤄질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물론 통신감청은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영장에 적시된 기록만이 업체를 통해 수사기관에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수사기관의 자체 장비를 통하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은 법사위 논의 과정에서 외국인 감청의 경우, 국정원에서 간접감청의 예외를 인정하는 방안이 논의 중이라는 점을 들어 “내국인인지 외국인인지의 구분도 국정원에 전적으로 위임한 상태에서 아무리 외국인 감청에 국한된다 하더라도 직접 감청은 절대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통신 및 인터넷 업체 측도 불만이 많다. 업체에 따라 많게는 수천억원까지 드는 감청 설비를 설치해야 하는 것도 부담인 데다 통신자료를 수사기관에 제공했다는 사실을 고객에게 고지할 의무까지 지게 됨으로써 가입자들의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고 더 나아가 ‘사이버 망명’까지 우려된다는 것이다.
문화연대와 참여연대, 미디어행동 등은 21일 국회에서 ‘통비법 개악 반대 집중행동 주간’ 선포 기자회견을 가진 뒤 피켓 시위와 법사위원장 면담 등 다양한 활동에 들어갔다.
<이지선기자 jslee@kyunghyang.com>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