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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활동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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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剛齊) 신숙(申肅)선생의 독립운동과 통일관(강사 孫子 신현억)
    [천도교 /천도교중앙대교당]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호이다. 대지 1,215평 위에 건평 280.68평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천도교의 제3세 대도주(大道主)인 손병희(孫秉熙)가 건립을 계획하고 일본인 나카무라[中村興資平]가 설계했으며,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이 시공하고 일본인 후루타니[古谷虎市]가 총감독을 맡아 건물을 완성했다. 1918년 12월 1일에 개기식(開基式)을 하고 1921년 2월 28일 완공되었는데, 공사비는 당시 돈으로 22만 원이 들었다. 전체평면은 이집트식 십자형으로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했으며,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아 벽체를 구성하고 맞배지붕은 철근 앵글로 되어 있다. 건물의 정면은 좌우대칭이며 중앙 현관부에는 반원 아치형으로 된 입구가 있고, 양쪽에는 벽기둥을 세웠는데 그 가운데에는 화강석으로 된 장식면이 있다. 정면 중앙에 탑이 있는데 탑 중앙부에는 큰 반원 아치형 창과 작은 반원 아치형 창 3개가 있으며, 탑의 지붕은 바로크풍으로 되어 있다. 완공 후 현재까지 6차례에 걸쳐 중수했는데 1956년 3차 중수 때는 6·25전쟁중 소실된 부분을 보수했으며, 1976년 6차 중수 때는 마루바닥을 콘크리트로 교체하고 난방과 전기공사를 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체적으로 독특한 의장수법을 지닌 건물로 한국 천도교의 총본산이다. 대전시 용전동에 있는 천도교 대전교구(신도교구 정정호)는 당일 천도교 포덕 151년 5월 9일(일) 오전 11시경 ‘경전봉독’을 개시한 후 천덕송은 공락가를 찬송한 다음, 강제(剛齊) 신숙(申肅)선생의 독립운동과 통일관에 대한 강의를 孫子 신현억(예명: 동덕)씨가 강의를 하였다. 본 행사를 주관한 노태구 교수(경기대학교 사회과학과 학장)는 천도교 중앙본부에 부교령으로서 서울에서 독립유공자인 신숙(申肅)선생의 손자이신 신현억씨를 모시고 대전교구에 갔으며, 부추실 박대표는 독립유공자 후손이신 김원웅 전 국회의원에게 연락하여 신숙(申肅)선생의 손자 신현억씨와 인사를 하도록 앞장섰다. 오후 12시 30분경 대전시장의 후보로 나온 민주당 김원웅 전 국회의원이 참석하여 신숙(申肅)선생의 독립운동과 통일관 이념에 대하여 승계를 하므로써 천도교 신도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201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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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여연대 등 18개 시민사회단체 국민감사 청구인단 모집 캠페인 시작
    MBC 의 '검사와 스폰서'편 보도로 촉발된 스폰서 검사의 비리 사건에 대한 국민감사 청구인을 모집하는 캠페인이 4일 시작됐다. 참여연대와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18개 시민사회단체는 4일 오전 11시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패․성매매비리 검찰에 대한 국민감사 청구인단 모집’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는 이른바 ‘스폰서 검사’들의 비리로 검사직무수행의 공정성 및 공익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며 감사 청구의 취지를 밝혔다. 이들은 검찰이 “이제껏 단 한 번도 감사원의 직무감찰을 받아본 적이 없는 조직”이라며, “문제는 검찰조직 전체에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감사청구는 공공기관의 사무처리가 법령위반 또는 부패행위로 인하여 공익을 현저히 해하는 경우 19세 이상 국민 300명 이상의 연서로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할 수 있는 제도이다. 캠페인은 5월 15일까지 진행된다. 다음은 기자회견문 전문 검찰의 부패・성매매 행위에 대해 국민의 이름으로 감사를 요구 한다 ! 한 지역 건설업자가 폭로한 검사들에 대한 뇌물・향응접대 리스트는 우리에게 검찰에 대한 실망을 넘어서 분노를 느끼게 했다. 25년에 걸쳐 100여 명이 넘는 검사들이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고 심지어 성매매를 한 정황이 드러났다. 국민들은 이 같은 검찰의 부패비리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며,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나머지 스스로의 잘못도 인정하지 못할 정도의 무감각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았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처럼 썩을 대로 썩은 부패비리를 두고도 검찰이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검사들로만 이루어진 대검 진상조사단과 법적 근거조차 없는 진상규명위원회에 대한 사후보고로 그동안의 부패비리를 끊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과연 국민들이 이 결과를 믿어줄 것이라고 정녕 기대하는가. 벌써부터 국민들은, 검찰이 또다시 자신들의 부패비리를 유야무야 덮고 넘어갈 것이란 의구심을 갖고 있다. 이 같은 불신을 키워온 것은 바로 검찰 자신이다. 그동안 검찰이 스스로의 부패비리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의지를 갖고 제대로 수사하고 처벌했다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1997년 의정부 법조비리, 1999년 대전법조비리, 2005년 안기부 삼성X파일과 윤상림게이트, 2006년 김홍수 게이트,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 이르기까지 검찰의 부패비리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검찰은 철저히 조사할 것을 다짐하고, 감찰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공소시효가 지났다’거나 ‘대가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법처리를 회피하고 관련자 몇 명의 옷을 벗기는 수준에서 마무리 지었다. 감찰을 강화하겠다며 감찰기구를 개방직화 했으나 다시 내부 검사들로 자리를 채웠을 뿐이다. 이번에도 국민들은 일부 실명이 거론된 몇몇 검사들의 징계에서 이번 사건이 마무리될 것이란 의구심을 갖고 있다. 이번에 걸린 자들만 운이 없었을 뿐이며, 부패의 고리는 더 깊고 은밀하게 지속되리란 불신이다. 문제는 검찰조직 전체에 있다. 우리는 대검찰청 산하 전 검찰조직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를 요구한다. 검찰은 이제껏 단 한 번도 감사원의 직무감찰을 받아본 적이 없는 조직이다. 그야말로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치부는 외면해온 권력이었다. 검찰의 부패비리에 대한 총체적 감찰을 요구하며, 국민감사청구권에 의거한 청구인단 모집을 시작한다. 이번 계기를 통해 검찰은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고 거듭나야 한다. 검찰이 진정한 ‘공익의 대변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대대적 수술이 필요하다. 검찰 스스로가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달라질 수 없다면 특단의 대책이 불가피하다. 오늘 국민감사청구는 시작일 뿐이다. 검찰이 새로운 조직으로 환골탈태 할 때까지 검찰을 변화시키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10년 5월 4일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마산YMCA, 문화연대, 민주언론시민연합, 부정부패추방실천시민회,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 전국철거민협의회중앙회, 참여연대, 참여불교재가연대,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투명성기구, 흥사단투명사회운동본부
    201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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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대 국회는 입법민원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부추실, 박흥식 상임대표는 지난 2010년 3월 3일자로 김형오 국회의장을 면담하기 위해서 공문을 작성하여 등기 우편으로 발송한 바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회신조차 통지를 아니하고 있다.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라는 헌법을 위반했다. 또한, 국회 사무총장은 민원사무처리에 관한 법률 제15조는 행정기관의 장은 민원인이 신청한 민원사항에 대한 처리결과를 민원인에게 문서로 통지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이 정하는 경우에는 구술 또는 정보통신망으로 통지할 수 있으며, 이경우 민원인의 요청이 있는 때에는 지체 없이 처리결과에 관한 문서를 교부하여야 한다. 라는 법률등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2010-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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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 계동 중앙고등학교 숙직실에서 거사계획을 하였다.
    부추실, 박 대표는 3․1운동 제91주년을 맏이하기 위해서 서울시내 유적지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2010년 2월 28일 10시 안국역 1번 출구에서 국학연구소 임원들과 모여서 서울 종로구 계동에 중앙고등학교 내에 3․1 독립관(당시 숙직실터)를 찾았다. <중앙고보 숙직실터> 이 장소는 1919년 3․1 만세운동을 실현하기 위해서 동경유학생 송계백이 현상윤, 송진우와 만나 2․8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3․1운동의 도화선을 놓은 곳이다. 계동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은 1919년 1월중 일본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하교로 교사 현상윤과 교장 송진우를 방문하여,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함으로써 3․1운동의 도화선을 놓은 장소다. 또한 2월 초 최린, 최남선, 송진우, 현상윤 등이 최린 집에서 회합을 가진 2,3일 뒤에 모여 독립운동 거사를 숙의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김성수 숙소터> 기독교계 지도자 이송훈이 송진우를 만나 천도교측의 거사 제의를 받고 3․1독립운동의 일원화 문제를 처음 논의한 곳이다. 1919년 2월 초순 재동 최린의 집과 계동 중앙고보 숙직실에 독립운동 거사를 모의하기 시작한 최린,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로 처음에 박영효, 윤용구, 한규설, 김윤식 등 대한제국 시절 요직에 있었던 명망가들을 모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천도교계와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거사를 추진하기로 하고, 최남선이 나서 평안도 기독교계의 지도자로 활약하던 이승훈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1919년 2월 11일 최남선의 편지를 받고 급거 상경한 이승훈은 김성수의 숙소인 계동 김사용의 집에서 최남선을 대신해 나온 송진우와 만났다. 이 자리에서 송진우는 이승훈에게 독립운동 거사계획을 알리고 기독교 측의 참가를 요청하며 동지 규합을 위해 당일 평안북도 선천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계동 김성수 숙소는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간접적으로나마 송진우를 매개로 첫 접촉을 갖고 톡립운동 일원화의 계기를 마련한 장소이다. <유심사> 3․1운동 당시 만해 한용운이 머무르며 불교잡지 (惟心)을 발행하던 곳으로 불교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 1919년 2월 24일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 사이의 독립운동 일원화가 성사되자,최린은 계동 유심사(惟心社)로 한용운을 찾아와 거사 계획을 설명하고 설명하고 불교계의 참여를 확약 받았다. 이후 한용운 합천 해인사 출신 승려로 서울 대각사에 머무르던 백상규 (법명 용성)를 불교계 민족대표로 참여시키는 한편, 2월 28일 밤 중앙 학림 학생 신성완 백성욱, 김대용, 오태인, 김법린, 박민오등을 유심사로 불러 각처에 배포한 독립 선언서 3천매를 전달 하였다. <손병희 집터> 3․1 운동 거사 전날인 1919년 2월 28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들이 상견례를 겸해 모여 독립선언서 장소와 절차 등에 대해 의견을 나는 곳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3인은 3․1운동 거사 전날인 1919년 2월 28일 서로 지면을 익히고 다음날 독립선언식 절차를 최종 점검하기 위해 가회동 손병희(1861~1922)의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 장소인 탑골 공원에 학생들이 집합하기로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일의 사태를 우려해 급히 선언식 장소를 명월관 지점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그로인해 기사 당일 일정에 다소 혼선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강기덕 숙소터> 3․1운동 때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을 활약한 학생단 대표 강기덕이 독립운동 거사를 준비하며 시내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세력을 규합한 곳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1886~7)은 대관원모임 이후 1919년 2월 초순경부터 서북학생친목회 등의 인맥을 통해 경성고보 김백평, 박노영, 중앙고보 장기욱, 선린상업 이규송, 보성고보 장채극, 전옥영 등 시내 각 중등학교 학생들은 안국동 자신의 집에서 숙소로 불러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강기덕은 자신의 하숙방에 불러 모은 중등학교 학생들에게, “민족자결 주의에 입각해 조선의 독립을 얻어내려는 움직임이 지식층 사이에 진행 중인데, 그것을 실행에 옴기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맡아야 할 역할이 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거사에 대비해 사전에 세력을 결집하며 준비할 것을 당부 하였다. 이렇게 규합한 중등하교 학생들은 3․1운동 과정에 일선 행동대로서 독립선언서와 각종 격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주도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옛 천도교 중앙총부터> 3․1운동 당시 천도교 측의 유력한 거사추진 거점 가운데 하나였던 곳 『최린 자서전』에 따르면 민족대표의 선정을 비롯한 천도교 측의 독립운동 거사준비는 손병희의 지도 아래 권동진, 오세창, 최린 3인이 수시로 회합하여 추진했다고 하는데, 그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가 송현동 천도교 중앙총부였다. 김양선의 논문에는 1924년 2월 24일 기독교측 대표 이승훈과 함태영이 천도교 총부로 찾아가 천도교측과 합동으로 거사를 결행하기로 방침을 결정했다고 알리자,손병희가 최린을 불러 함태영과 함께 구체적인 절차를 논의토록 지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근거자료가 명확치 않아 정확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경성서적 조합 사무소 터> - (조선 독립 신문 ) 인쇄지 3 ․ 1운동 직후 독립운동의 진상을 알리는 (조선 독립신문 ) 2,3,4,호 를 인쇄 한고 보성사에서 (조선 독립 신문) 창간호를 인쇄한 1919년 3월 1일 당일 발행인 윤일선 이 체포되자, 신문 발행을 주관하던 천도교 월보사 주필 이종린은 관훈동 155번지 경성 서적 조합 사무소로 장소를 옮겨 장종건 임승옥 ,김영조,와 함께 비밀리에 등사판으로 (조선 독립 신문 )제 2,3,4,호를 인쇄하였다.(조선독립 신문)은 3월 10일 이종린이 체포된이후 장종건 등 계승하여 광화문통 85번지 유병륜의 집에서 제5,6,7,호를 발행하고, 이어 경기도 군 용강면 공덕리 195번지 ( 현 마포구 )남치훈의 집에서 제 8,9,.호를 발행하였다.이 사실이 일제 경찰에 탄로나 3월 25. 장동건 최치환이 체포되었지만 이후로도 ( 조선독립 신문)은세브란스 의전 이용선 그룹을 비롯한 다양한 계통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행 되었다. <이종일 집터> - 3 ․ 1 독립선언서 배 포 지 3 ․ 1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 선언서를 비밀리에 운반해 각처로 배포 한 곳 3․ 1운동 민족대표에 대한 ‘예심 종결 결정 ’에 따르면,보성사 사장 이종일 (1858-1925)은 1919년 2월27일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약 2만여 매를 비밀리에 자신의 집으로 운반 해보관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기독교 측의김창준과 함태영, 불교측의 한용운등에게 교부하고, 천도교 인맥을 통해 전국 각지의 천도교구에 배포함으로써 전국적인 독립만세의 발판을 놓았다. < 보성사 터> 1919년 3 . 1운동 이전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3월 1일 (조선 독립신문) 제1호를 발간한 곳. 보성사는 대한제국 궁내부 내장원경 등을 역임하며 고종의 측근으로 활약하던 이용일 (1854-1907)이 1906년 아어(俄 語 :러시아)학교 자리에 보성중학교를 설립하면서 교재 출판을 위해 학교 구내에 설치한 인쇄소였다. 보성중학교 와 보성사는 이용익 사후 재정난으로1910년 천도교로 경영권이 넘어가 3 ․ 1운동 당시 최린이 보성고보의 교장을,이종일이 보성사 사장을 맡고 있었다. ‘예심 종결결정’에 2월27일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2만 1천매를 인쇄하고, 3월 1일 당일 천도교월보사 주필 이종린 주관 하에 독립선언에 호응하여 궐기할것을 촉구한 (조선독립신문) 제1호(발행인 윤일선)를 찍어낸 곳이다. <태화관 터> 1919년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곳 1919년 3월 1일오후2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인은 요리점 태화곤에 모여 독립선어식을 갖고,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뒤전화를 받고 출동한 일제경찰에 연행되었다. 태화관 터는 본래 반정으로 왕위에 즉위하기 전 인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이후 아동 김씨 김홍근의 저택,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순화궁으로 그 주인이바뀌었다. 그리고 일제가 한국을 강점할 무렵에는 이윤용 ,완용 형제가 번갈아 차지해 살면서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 뒤 명월관 분점 태화관이 자리 면서 3 ․ 1운동을 맞았고, 이후 감리교에서 구입하여 태화여관으로 사용하였다. 현재 이 자리에세워져 있는 태화빌딩은 태화 기독교 사회복지관의 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승동교회> 3․ 1운동 준비과정에서 제1,4회 학생단 간부회의가 열린 장소로,학생단 독립운동의 거점. 승동교회는 연희전문 출신의 학생단 대표 김완벽(1894-1928)이 다녔던 교회로,3 ․ 1운동 준비과정에서 1919년 2월 20일 학생단제 1회 간부회의를 열어조직 체계를 정비한 곳이다. 2월28일에는 제 4회학생단 간부회의가열려 학생조직 동원을 최종 점검하고 독립선언서 배포 등과 관련한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이튿날 탑골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시발점으로 하는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의 발판을 놓았다. 승동교회는 1893년 북장로회 선교사 사무엘 무어(1860-1906)가 지금의 롯데호텔 부근곤당골에 세운 교회에서 비롯 되었으며,1905년종로 피맛골 뒤편 지금의 자리로 옮기며 ‘ 이름을 갖게 되었다.’ 승동교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교회 는 대가집 소실 (小 室)들과 장인, 백정들이 모여 들이 ‘첩장교회’란 별명이 붙은 당시의 대표적인 민중교회 였다. <탑골공원>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거행한 장소 3 ․ 1운동 전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사전 연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독립선언식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한 사실을 확인한 학생 대표들은태화관을 항의방문한 뒤 당초 예정 했던 탑골공원에서 3월 1일 오후 2시 같은시간에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 하였다.학생대표가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자,학생들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공원을 나서 시가행진에 돌입하였다.이때 종로를 거쳐 덕수궁 대한문에 이르는 길의 수많은 군중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만세시위는 대대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 하였다. 3 ․ 1운동 의 거족적인 독립 만세 시위는 이렇게 탑골 공원에서 점화도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0층 석탑이있어 탑골이라는 이름이 붙은 탑골공원은 본래 원각사라는 절이 있던곳으로 ,대한제국기에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3 ․ 1운동의 발화지로 역사의 큰 자취를 남겼다. 대한문 앞 및 선은전 광장 3 ․ 1 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일 탑골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뒤, 오후 3시경 고종 황제의 빈전이 마련된 덕수궁 대한문 앞에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연설을 한 시위대의 일단은만세를 부르면 장곡 청정(현 소공로)을 거쳐 남산 조선 총독부를 향해 행진하였다. 행열이 조선은행 (현 한국은행)앞에 이르자 학생과 시민이 합류하여 인파가 3천명 으로 늘어 났다. 시위대는 총독부를 향해 본정통 (현 충무로)으로 들어서며 이를 저지하는 일제 군경과 맞섰다. 이부는 저지선을 뜷기도 했으나,용산 조선군 사령부에서 보병 3개 중대와 기병1개 소대를긴급히 추가 배치함으로서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다. 제 1 장 3 ․ 1 독립운동의 배경 1.일제의 한국 병탄과 식민지 무단 통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소위 ‘정한론 ’(征韓論)이후 이미 19세기 중엽부터 근대국가의실력을 기르면서 기회만 있으면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화 하려고 단계적으로 끊임없이 침략정책을 강화해 오다가 ,190511월 ‘을사 5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 등 국권의 일부를 빼앗고,1910년8월에는 그들의 강대한 무력으로 한국민족의 피어린 저항투쟁을 압살한후 마침내 한국을 일제의 ‘식민지’로 병탄 하였다. 2. 1910년대 3 ․․ 1운동 이전의 독립운동 한국 민족은 일제의 이러한 잔혹한식민지 무단 통치와 야수적 탄압과 민족 말살 정책과 식민지 수탈 정책에 대해서 온갖 방법으로 분투하였다. ▲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은 어떻게 진행 되었나? ▲국외에서의 항일 운동은 어떻게 진행 되었나? 만주.노령. 상해. 일본. 미국등 한국 민족은 1910년 8월 이후 의 이러한 독립운동 세력들이 불굴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1914년 1 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1918년 종전이 가까워오자 국세정세의 대변동이한국민족 독립운동에 미칠 영향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제 2장 3 ․ 1 독립운동의 태동 3 ․ 1운동을 태동시키고 처음에 기획하여 하나의 대규모 독립으로 합류케한 독립운동으로 세력에는 다음과 같은 7개의 세력의 후름이 있었다. 1. 신한 청년단(新韓靑年團)의 독립 운동 김규식은 파리 평화회의에 출발에 앞서 신한 청년단으로부터 다음 12개 항목에cml 임무를 수행토록 지시를 받았다. (1)평화회의에 출석한 각국대표들을 면접하고 한국의 동정과 지지를 얻으것. (2)파리에 비공식적 으로 가 있는 유력한 인사들과 면접할것. (3)일본 무단 통치 하의 한국의 정치, 경제 및 종교의 여러 가지 사정을 알릴 것. (4)일본의 한국에 대한 야욕을 폭로 할것. (5)일본의 몽고, 시베리아.산등(山.東 )양자강 지역, 복건. 테국.필리핀.남해 및 인도에 대한 야욕을 폭로 할것 (6)한국은 극동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었서 열쇄와 같은 중요한 위해 있다는 것을 역사적, 지리적 및 전략적 이유를 설명할것 (7) 미국, 영국, 프랑스 및 이탈리아의 유력하고 책임성 있는 신문기자들의 동정적인 협력을 얻어 한국독립에 대한 세계적인 여론을 조성할것. (8)미국,영국.이탈리아.중국의 유력한 신문들을 통하여 전세계에 한국사정을 알리고,세계의 정치가들, 외교 지도자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한구에 대한 동정적 여론 조성 할것. , (9)파리,런던,샌프란시스코,상해 등지에 홍보국을 설치하고,또 모든 방법을 통하여 직접 간접으로활약 할것. 세계의 정치가들과 외교지도자들,그리고 각국 국민들간의 여론이 어떻게 돌고 있는지를 그동 알릴 것. (10)선전물, 선전작품 그림이 든 전단등을 작성하여 반포 할것 . (11) 왜 한국이 독립해야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며,한국사람이 자치할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 할것. (12)평화회의에서 대표로 인정 받을 것을 정식으로 요구하고,한국해방에 데한 정식 청원서 를 제출할것. 이 청원서를 자세하고 포괄 적일 것. 2.만주와 노령지방의 독립운동. 3.미주(미주)지방 독립운동. 4.재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제 3장 3․ 1 독립 선언의 준비 1.독립선언서( 獨立宣言書 )작성. 2.독립 선언서의 인쇄 3.독립선언서의배포. 4.민족 대표의 선정. 5.거사일자(居士日字 )의 결정. 제 4장 3 ․ 1운동의 전개 1.독립의 선언 2.독립만세 시위의 시작. 3.국내전개 4.국외 전개 제 5장 3 ․ 1 독립운동의 민족사적 의의. 제 6 장 3 ․ 1 독립운동의 세계사적 의의 참고문헌 :신용하 저 「3.1 독립운동」
    201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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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 선생 서거 74주기 추모 단재흉상 봉환(奉還) 고유제(告由祭)
    부추실, 박흥식 상임공동대표는 신홍우 공동대표, 강석현 공동대표 및 김성예 부단장 등과 함께 충부 청원군 귀래리 단재 신채호 선생님 사당과 묘지에서 74주기 추모제 행사에 참석하여 선생님의 뜻과 정신을 이어받아 후손에게 물려주는 승계하기 위함이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 파괴 - 폭동으로서,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화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 서거 74주기 추모 단재흉상 봉환(奉還) 고유제(告由祭)가 21일 오후 3시에 민주당 대전시장 예비후보 김원웅 전 의원 사무실에서 열렸다.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 있던 단재흉상을 모신 이날 고유제에는 단재의 손자인 신상원씨를 비롯 150여 명의 유족과 기념사업회 관계자 및 시민들이 참석했다.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인 김원웅 예비후보는 "단재정신을 충절의 고장 대전의 정체성으로 삼고 대전역에 단재동상을 건립하겠다"면서 "일제잔재인 대전역과 충남도청을 연결하는 '중앙로'를 '단재로'로 개명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김 전 의원은 지난해 12월 대전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전에서 태어난 단재를 통해 대전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1880년 12월8일 대전 중구 어남동 도리미마을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언론인 등으로 활동하다가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joemedia@newsis.com
    2010-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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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범죄행위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시민사회단체 새날희망연대 회원 등 50여 명은 올해 아키히토 일왕 방한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과 관련해 7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 관계가 근본적으로 정립되기 전까지는 일왕 방한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또 "1965년 체결된 한일조약에는 일제강점에 대한 사과가 여전히 빠져 있으며,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반환 요구에 일본은 지금까지 묵묵부답하고 있다"며 "일왕 방한은 자칫 일본에게 식민지 침탈 범죄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 되므로 현시점에서 시기상조"라고 강조했다. 이날 회견 참가자들은 `일왕 방한을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성명서'에서 일왕 방한의 선결 과제로 일제 식민역사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1965년 한일협정은 재체결돼야 하고, 대일청구권 문제는 다시 논의돼야 하며, 전쟁범죄행위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사 참가자들은 또 △일본 국내청에 보관돼 있는 명성황후 의궤와 조선왕실도서의 반환 △인중근 의사 유해 송환 △왜곡된 역사교과서 철폐 △독도 영유권 주장 망언 중단 △식민지 강제 연행의 진상 규명과 사죄 및 보상 △재일 한국인에 대한 탄압과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는 `일왕 방한을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결의'를 채택했다. 이날 행사에는 새날희망연대와 역사 관련 37개 단체로 구성된 `동아시아역사 시민네트워크' 회원들이 참가했으며 김원웅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장과 이이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의 인사말에 이어 정동익 사월혁명회 상임의장이 취지문을 낭독했고,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과 유원옥 정의사회운동전국시민연합 대표, 이성민 국학운동시민연합 대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격려사를, 이장희 한국외대 교수가 회견문을 낭독했다. 이어 평화통일시민연대 김승자 공동대표와 윤영전 상임고문, 서굉일 국학연구소장, 정상률 동아시아역사 시민네트워크 운영위원장, 최천택 한신대 명예교수 등이 결의문과 하토야마 일본 총리에게 보내는 서한을 낭독했으며 끝으로 원로 민족시인인 이기형 옹의 만세삼창 순으로 진행됐다. 희망연대 측은 조만간 일본 대사관에 서한을 전달하고 답신을 요청할 예정이다. gogo213@yna.co.krkjw@yna.co.kr
    201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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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방구 약속어음을 발행하여 법원등에 행사하여도 죄가 않된다.
    불기소이유 통지내용 이 사건을 담당한 최용훈 검사는 사법경찰관이 작성한 의견서에 기재된 범죄사실과 같음. 불기소이유 : 피의자 조성연이 이른 바 '문방구' 약속어음(액면 45만원)의 '지급받을 자' 란에 고소인 명의(김성예)를 기재하였음이 인정되는데, 이와 같이 약속어음용지의 '지급받을 자'란에 고소인 동의 없이 고소인 명의를 기재하였더라도 자격모용유가증권작성과 혹은 유가증권위조죄에 해당하지 않고 이를 행사하는 것도 별도로 구성요건에 해당되지 아니하므로 범죄 인정되지 아니하여 혐의없음. 1. 범죄사실 1) 피의자1) 이재신은 부동산중개업, 같은2) 조성연은 건설업을 하는 자들로서, 상호 공모하였다. 1991. 10. 11. 피의자1) 이재신의 경기 과천시 별양동 1-7, 110, 부동산 사무실에서 행사할 목적으로 불상의 필기용으로 일반 약속어음용지 62장의 성명란에 김성례 앞, W=450,000, 금액란에 四十五萬원정(이자), 지불기일 1993년 10월 11일, 발행일 1991년 10월 11일, 발행지 우측 공란에 조성연을 기재하고 조성연 인장을 날인하여 조성연 명의의 위 약속어음 62매를 위조하였다. 2) 2004. 4. 6. 같은 달 23.에 서울중앙지방법원 2003가소198507호 대여금반환 사건에 위 62매의 약속어음이 진정한 것처럼 제시하여 행사하였다. 위 피의자들의 행위를 형법 제215조, 제217조에 해당하는 범죄로 인정 수사 한 바, 고발인 김성예는 자신이 1986년도부터 1990년도까지 과천에서 제일식당을 운영하고 있을 때, 이재신이 손님으로 자주오면서 알게 되었으며, 자신이 식당을 그만 둔 후에 다른 일을 하려던 중 이재신이 자신에게 어렵게 고생하지 말고 부동산에 2-3년만 투자하면 돈을 쉽게 벌 수 있다고 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에 맞추어서 땅을 사 달라고 하였더니 영주에 땅을 사준 사실이 있는데, 그러는 중 이재신의 친구 조성연이 2,500만원을 3부이자로 빌려 주라고 하여 자신은 2,500만원은 없고 1,500만원만 있다고 하니 이재신이 자신이 보태서 빌려 준다며 1,500만원이라도 빌려 주라고 해서 1991. 10. 11에 이재신에게 주 었으며, 그 때 이재신의 사무실에서 조성연을 만난 적이 있고, 그 때 인사 하면서 조성연이 1,500만원을 받았다는 영수증을 직접 작성하여 자신에게 주었고, 자신은 1년치 이자를 받았다는 근거로 삼으려는 백지영수증 12장을 이재신에게 써 주었는데, 그 때부터 이자가 매달 45만원씩 들어와야 하는데, 이자가 들어오지 않아 자신이 이재신에게 찾아가면, 조성연이 이자를 제때에 주지를 않는다며 자기 돈으로 일부를 준다며 5만원 내지 3만원을 건네주었으며, 그렇게 하여 자신이 1,500만원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은 것이 300만원 정도이며, 이자를 계속 찔끔찔끔 주어서 자신이 이재신에게 원금 1,500만원을 돌려달라고 하였더니, 이재신이 돈을 차용하여 줄 당시 조성연의 마산 근처의 고성땅에 대한 근저당설정을 한 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라고 하여, 근저당설정 해지 하기 위한 자신의 인감증명서, 인감도장, 주민등록등본 등을 가져다 주었더니, 이재신이 자신에게 돈이 1,150만원 밖에 없다며 나머지 원금과 이자는 조성연이 오면 고성 땅을 팔아서 주겠다고 하였으며, 그런 와중에 이재신이 자신에게 사 준 경북 영주 가흥동 땅에 대하여 사기당한 것을 알고 이재신과 땅 소유자 이용미를 고소하여 이재신이 구속 된 사실이 있으며, 이재신이 구속되었을 당신 이재신의 처 임인숙을 자신에게 보내서 합의를 요청하였고, 이재신은 조성연에게 돈을 빌릴 당시 백지로 작성하여 주었던 영수증에 200만원짜리 영수증을 만들어서 민사법정에 제출한 사실이 있으며, 자신이 이재신과 조성연을 자격모용유가증권위조와 행사죄로 고발한 이유는 이재신이 석방 된 후에 처 임인숙이 자신을 상대로 공갈, 혐박으로 고소를 하여 자신이 공갈죄로 기소가 되어 200만원 벌금형을 받았고, 그러면서 임인숙이 자신을 상대로 900만원에 대한 부당이득금 반환소송을 하여 자신이 패소한 사실이 있고, 이재신과 임인숙이 자신의 과천아파트에 가압류를 하여 경매신청을 하여 놓아, 자신이 부당이득금 900만원과 모든 비용을 포함하여 2,600만원을 주고 영수확인서를 받았는데, 그 후 자신이 억울하여 2003. 11. 초경 이재신을 상대로 부당이득금 900만원과 피비해용을 포함하여 39,198,000원에 대한 반환 소송을 하였는데, 그 대 이재신이 자신의 돈 700만원과 김성예 자신의 돈 1,500만원을 합하여 2,200만원을 조성연에게 빌려주어, 매달 이자 660,000원이 들어오면 자신에게 매달 450,000원을 지급하면서 450,000원짜리 약속어음을 회수하였다고 하면서 450,000원짜리 약속어음 62장을 법정에 제출하여, 그 것으로 인하여 자신이 또 다시 패소를 하여, 항소를 하였는데 항소도 기각이 되었고, 상고를 하였는데 인지대가 없어서 각하가 된 사실이 있는데, 이재신과 조성연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 고발 하였다고 진술하며, 추가진술서를 제출하고 있고, 고발인 박흥식 은 피의자 이재신이 약속어음을 김성예에게 주었다가 이자를 주고 회수를 하였다고 하는데 조성연이 조성연이 이재신에게 이자를 입금한 것을 보면 중간 입금을 하지 않은 달이 많이 있는데, 어떻게 약속어음을 회수하였다는 것이며, 조성연이 1,500만원짜리 약속어음을 발행하여 근저당설정을 하여 주었는데, 또다시 45만원짜리 약속어음을 발행하여 김성예에게 주었다는 것이 말이 안되며, 이재신이 돈을 준다는 명목으로 근저당서류 등을 달라고 하여 주었기 때문에 돈을 안 받을 수가 없어서 1,150만원을 김성예가 받은 것이라고 진술하고, 고발인 한창선 은 피의자들의 450,000원짜리 약속어음 원본이 없다고 하는데, 나중이라도 또 다시 원본을 내 놓을 줄 모르니 보장책을 만들어 달라는 진술을 하고 있고, 피의자 조성연은 자신이 고발인 김성예에게 돈을 빌리는 자리에서 자신이 이재신에게 보내는 이자의 450,000원을 김성예에게 지불할 때마다 김성예에게 한 장씩 받은 것으로 만들고자 이재신이 내 놓은 약속어음 62매에 자신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기재하고 도장을 날인 한 사실이 있으며, 자신이 서류와 약속어음 영수증, 450,000원짜리 약속어음 62매를 받아 보관하던 중 2008년 12월에 모두 폐기하여 버렸는데, 김성예가 이재신을 4-5년전에 관악경찰서와 강남경찰서, 남부검찰청 등에 고소를 하여 자신도 같이 조사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 후로 4-5년동안 조용하여 정리하는 차원에서 폐기 한 것인데, 고소인이 또 다시 고소를 한 것이라고 변소하고 있고, 피의자 이재신은 1991. 10. 11. 조성연에게 자신의 돈 700만원과 고발인 김성예의 돈 1,500만원을 빌려 주는 과정에 자신이 조성연으로부터 이자 660,000원을 받아 김성예에게 매월 450,000원을 지불하면서, 자신의 사무실에서 작성하였던 450,000원짜리 약속어음 62매를 매월 한 장씩 받으려고,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던 약속어음 62장에 날짜와 금액, 그리고 고발인 김성예의 이름 등은 자신이 적은뒤, 조성연의 날인은 조성연이 직접 기재하여 작성한 것이며, 450,000원짜리 약속어음 62장은 김성예로부터 영수증, 근저당서류 등 모든 서류를 받아 조성연에게 원금을 받으면서 넘겨주었다고 변소하고 있는 사안으로, 본 건 -기 히 고발인 김성예가 2003. 11월 초경에 부당이득금 반환소송을 할 당시 피의자 이재신이 위 450,000원짜리 약속어음 62장을 법정에 제출하여 그로 인하여 패소를 하였으며, 자신이 다시 항소를 하였으나 기각이 되었고, 또한 상고도 기각을 당하였는데, 당시는 원본도 존재를 할 당시인데, 자격모용유가증권작성죄로 고소, 고발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원본이 없는 현재 다시 고발을 하였고, -고발인 김성예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450,000원짜리 약속어음이라고 주장하는 것 외에 피의자들의 위 450,000원짜리 약속어음 62장을 위조하였다는 입증 자료 제출치 못하고, -450,000원짜리 약속어음에 서명하고 날인을 하였다는 피의자 조성연의 진술등으로 보아 -피의자들의 범죄사실에 대하여 인정할만한 입증자료 발견 할 수 없어 불기소(혐의없음)의견임. 20. . . 서울서초경찰서 사법경찰관 경위 이석철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귀하
    201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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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날희망연대 임원들과 용산참사 노제에 방문....
    부정부패추방실천시민회(약칭 부추실) 박흥식 상임공동대표는 지난 2010년 1월 9일 오후 12시에 퇴계로 대림정에서 새날희망연대 1월 정례회겸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후 임원들(강석현 한단련 공동대표, 김병태 한국농정신문 상임고문, 정동익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최천택 한신대 명예교수)과 함께 용산참사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노제행사에만 참여하였다. // 지난해 1월 발생한 용산참사 철거민 희생자 5명에 대한 장례식이 서울역 광장에서 엄수됐다.오전 9시 발인식에 이어 낮 12시 15분 시민과 사회단체 회원, 정당과 각계 인사 등 2,5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시작된 장례식은 개식사와 약력, 조사, 조가, 진혼무,유가족 인사, 분향, 헌화 등의 순서에 따라 진행됐다.유족과 참석자들은 장례식을 마치고 용산참사 현장까지 약 3km 구간에 이르는 거리 행진을 한 뒤 참사 현장에서 노제를 지냈다. 거리 행진에 이은 노제로 서울역에서 용산 남일당까지의 일부 차로가 한동안 통제되어 무려 4시간에 걸쳐 용산참사 현장에 도착하였다.경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서울역 광장에 전경 44개 중대 등 모두 67개 중대, 4,700여 명을 배치했지만 다행히 연행자나 폭력사태는 없었다.
    2010-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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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상의, 신년인사회 열어···李대통령외 경제계 인사 천여명 참석
    부추실 박흥식 상임공동대표는 19년전의 벤처 중소기업인 만능기계(주)를 운영하던 시절을 되돌아보기 위해 2010년 1월 6일 오후 5시 삼성동 코엑스 무역회관 그랜드볼룸에서 개최하는 대한상공회의소 신년인사에 오후 4시 20분경 도착하였다. 그런데, 무역회관 그랜드볼룸 앞에는 많은 중소기업인들이 본 행사진행자의 안내를 받으면서도 초청장에 첨부된 비표와 명찰을 교환하기 위해서 비표를 주고 명찰을 받아서 가슴에 달은 후 검열대에서 몸수색까지 마친후 그랜드볼룸 안으로 입장하자, 마자 대한상공회의소 손경식 회장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으며, 또한 경제계 5단체장과 임원들이 길게 줄지어 있어서 박대표는 들어가면서 일일이 새해 인사를 나누며 악수를 하면서 입장을 하였다. 입장후 5시가 되자 이명박 대통령이 입장한다는 안내와 함께 입장한 후 경제계 인사와 정·관계, 사회 각계, 주한 외교사절 및 외국기업인 등 각계 주요 인사 1000 여명이 신년인사회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손경식이 인사말을 시작으로 경제 5단체장이 인사말을 한 후 이어서 이명박 대통령이 새해 인사말을 하였다. 이 자리에는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 등 경제5단체장과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박용현 두산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강덕수 STX 회장, 김윤 삼양사 회장,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구본준 LG상사 부회장, 김상열 대한상의 상근부회장 등 기업인들이 참석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 주호영 특임 장관 등 관료들도 참석했다. 국회에서는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과 정세균 민주당 대표, 정장선 지식경제위원회 위원장 등이 자리를 함께 했고, 압둘라 알 마이나 주한 UAE대사, 에이미 잭슨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대표, 아와야 쯔토무 서울재팬클럽 이사장 등 외교사절과 외국기업인들도 대거 참석했다. 이날 손경식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가 불황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고는 있지만 너무 낙관적으로 미래를 확신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면서 "우리나라 경제가 정상적인 성장궤도에 진입할 수 있도록 고용 창출과 투자 확대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할 때"라고 밝혔다. 이어 "올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용자와 근로자, 수도권과 지방 등 모든 부문이 서로 협력하고 상생하는 한해가 돼야 한다"며 "경인년이 경제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선진화로 향해 나가는 원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국회를 바라보기에 맨날 싸우는 것 같아도 경제를 살리자는 데에는 여야가 없다"며 "올해는 여야가 더 양보해 국민들이 걱정하지 않는 국회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경제단체장들의 신년 덕담도 이어졌다.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은 "새해 호랑이의 기운을 이어받아 국위가 한단계 성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공일 한국무역협회장은 "올해 11월 열리는 G20 정상회의를 통해 국격을 높이자"고 강조했다. 이수영 경영자총협회장은 "올해를 노사관계 선진화의 원년으로 삼자"며 "법개정 내용이 산업현장에서 실천되도록 해야 한다"는 덕담을 남겼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은 "일자리 창출은 중소기업이 몫을 차지해야 한다고 본다"며 "중소기업들도 일자리 창출에 매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행사 참석자들은 새해 의지와 각오를 다지는 의미로 '코리아 파이팅'을 외쳤다. 이 대통령은 행사장을 떠나면서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각계 대표들이 상생과 화합의 정신으로 더욱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각 경제5단체장이 돌아 가면서 건배제의를 외친후 만찬이 시작되자,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중견기업 대표이사들을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격려를 시작하자, 참석한 기업인들과 경호원들이 모두 이명박 대통령 주위로 몰려 들었다. 이때, 박대표는 단상이 있는 앞쪽으로 가서 각 기업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에게 닦아가서 명함을 주면서 "저의 단체에서 국회에 청원을 했는데 좀 도와 주시길 바랍니다" 라고 악수를 하면서 인사를 했으며, 정몽준 대표는 알아 보겠다고 화답을 하였다. 그 옆에 있던 "민주당 정세균 대표"에게도 시민단체에서 참석했는데 청원심사를 도와주십시요. 라고, 명함을 주고 악수를 하면서 인사말을 하였고, 그 옆에 있던 박병석 17대 정무위원장에게도 명함을 주고 악수를 하면서 도와 달라는 말을 하는데, 그 뒤쪽에 김형오 국회의장이 닦아서기에 바로 명함을 드리고 악수를 하면서 "시민단체에서 참석했는데 도와주십시요" 라고 말하자, 국회의장은 부추실 박대표 얼굴를 알아 보뜻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으로 화답을 하였다. 그런후 박대표는 행사장을 바로 나와서 삼성동에 있는 강현권 부단장과 추어탕으로 저녁을 먹은 후 삼성역에서 전철을 타고 귀가 했다. 위와같이 '대한상공회의소 신년인사회'는 매년 1월초에 개최된다. 국내 주요 기업인은 물론 각료,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사회단체 및 학계, 언론계 대표, 주한 외교사절 및 외국기업인 대표 등 주요 인사가 대거 참석하는 경제계 최대 행사로 꼽는다. ▶ 2010년 1월 6일 삼성동 코엑스에서 대한상공회의소 2010 신년인사회 행사가 있었습니다.
    2010-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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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정치광장을 함께 만들어 나갑시다!
    민주주의를 사랑하고 생명평화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는 시민여러분. 2010년 경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 했던가요? 묵은 것을 제대로 털어낼 수 있는 과단성과 새로움을 위해 호시우보(虎視牛步)하는 지혜가 필요한 해입니다. 퇴행으로 점철된 2009년은 참으로 긴 한 해였습니다. 민주화시대를 이끌었던 두 전직 대통령을 잃었고, 용산의 망루에서는 우리사회가 따뜻하게 품어야 했던 약한 이들이 이슬처럼 사라져갔습니다. 평택의 쌍용자동차 공장 지붕에서 처절하게 솟구쳤던 노동자들의 비명이 귓전에 맴돌고, 시국을 걱정하며 이름 석자를 올렸다는 이유로 공무원들과 선생님들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구시대적인 악습이 사회발전을 짓눌러 새로운 사람, 혁신적인 시스템이 건강하게 착근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4대강 사업을 비롯한 토목사업은 더욱 커져 갔고, 지역균형발전정책을 비롯해 25%의 정책집행단계에 있는 ‘행정중심복합도시’는 무산위기에 있으며, 사회복지와 서비스의 발전은 더뎠습니다. 정치권력의 손아귀에 미디어가 흡수되었고, 공공성이 취약해진 교육은 자구적인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사교육 시장 의존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화의 힘을 확인하게 됨이 큰 진전입니다. 국민들의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로막는 강압적 통치방식이 위헌으로 결론 났고, 지난 정부에서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가당찮은 구실을 삼아 해임됐던 인사들은 현 정부의 잘못으로 판결이 내려져 뒤늦게나마 명예를 되찾았습니다. 촛불항쟁으로 저항했던 시민단체들을 '불법폭력시위단체'라 하여 온갖 불합리한 차별을 자행했던 것조차 부당했다는 판결이 이어졌습니다. 굳건히 닫힌 광장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조례개정 문턱까지 치닫게 되었으며, 10.28 재보궐선거에서는 정권의 오만과 독주를 혹독하게 심판하는 대중들의 현명한 행동을 경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밑바닥부터 큰 변화의 힘이 제법 힘 있게 꿈틀거리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이제 시민들 스스로가 희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2010년은 시민참여정치의 원년입니다. 2010년은 이명박정부가 집권 중반기로 접어드는 해이지만, 길게 보면 경술국치 100주년, 6.25전쟁 60주년, 4.19혁명 50주년, 5.18민주항쟁 3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그러면서도 6월 2일에는 16명의 광역자치단체장을 비롯한 기초자치단체장과 광역 및 기초의원, 교육감과 교육위원을 국민들이 직접 뽑는 지방선거가 있습니다. 마치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를 향해 흘러온 근대사가 방사형으로 수렴되어 그날에 닿을 듯합니다. 격동의 근대사가 올 해 지방선거를 정점으로 새롭게 펼쳐질 것입니다. 이명박정부의 반민주성, 반인권성, 반환경성을 탓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정당의 비정상적인 구조로 인해 시민들이 배제된 정치는 커다란 저항 없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조그마한 파열구를 내고 시민이라는 좋은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것이 시민정치운동입니다. 그것으로부터 희망을 주는 정치는 시작됩니다. 보다 더 민주적이고, 보다 더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시민들 스스로의 우직한 행동이 새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시민운동이 중심에 설 것입니다. 새 역사를 위해 시민들의 마음을 크게 모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누군가는 책임 있게 나서서,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시민들이 더 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일, 새로운 일꾼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서 호혜의 정치, 희망의 지역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일, 그 모든 것은 시민참여정치 원년에 이뤄야 할 것들입니다. 시민참여정치 원년은 정치로부터 배제되고, 홀대받은 시민들이 다시 그 중심에 서고자 하는 일이기에 시민운동이 중심에 설 것입니다. 제한된 주권이 아니라 온전한 시민주권시대를 위한 대장정을 시민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당하게 시민참여정치의 광장을 열어젖힐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들도 늘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2010년 1월 5일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부추실 참석회원 명단 박흥식 상임공동대표, 강석현 공동대표, 김성예 시민감시단 부단장, 한봉순 시민감시단원, 김기윤 시민감시단원입니다.
    2010-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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